walking around the town( 동네 한 바퀴)
겨울이 다가올수록 눈 뜰 때 거뭇한 아침은 포근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오늘 아침 창 밖은 소소한 빗방울과 뽀얀 안개가 나른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다.
님편과 딸, 아들이 각자 가야 할 곳으로 간다. 룰루랄라..
어느덧 놀고먹는 것이 '십문칠'로 딱 몸에 맞아 버린 문여사는 혼자만의 이 시간이 너무 좋다.
그런데 혼자 있는 그녀를 또 누군가가 뒤흔든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딱 한 번만 더 나와 함께 해 줘.
당신을 도저히 못 놓치겠어.
아무도 없잖아.
지금 집에 당신밖에 없잖아.
나를 받아줘, 제발..
난 당신 꺼야.
당신 꺼라니까..
안 돼, 안 돼..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
내겐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이제 너랑은 끝이야, 정말 끝이라고..!
그렇게.. 혼자 있는 문여사에게 끊임없이 질척대던 홈쇼핑이란 넘과 힘겹게 쫑을 낸 그녀는 남편이 끓여놓은 된장찌개와 딸이 남기고 간 반찬을 긁어먹으며 흠칫.. 놀란다.
'아니, 된장찌개가 왜 이렇게 맛있지?'
남편에겐 늘 입맛이 없어 밥을 한 숟가락 겨우.. 겨... 우.. 먹었다며 뻥 치던 그녀,
오늘도 혼자서 된장찌개에 밥 반공기를 뚝딱하곤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거실 창 밖을 바라본다.
'흠.. 곧 비가 그치겠는걸..'
비 그치면 그녀는 갈 곳이 있다.
바로 '가을'이다. (욱.. 문여사, 이 오글거리는 감성은 뭐지?)
오늘은 작정하고 촉촉해질 대로 촉촉해진 가을을 걸어볼 생각이다.
요 며칠 꽂혀 있는 이은미 노래 '녹턴'을 크게 틀어 놓고 100점짜리 감정과 10점짜리 음정으로 따라 부르며 별로 할 것도 없는 집안일을 하는 문여사는 늘 이것이 궁금하다.
'느긋한 시간은 왜 이리도 빨리 가는 걸까?'
느긋한데 빠르다니..드릅게 말 안 되는 것만 골라서 생각하다니.. 딱 그녀답다.
'아침 세안은 역시 고양이 세수가 답이지..'
아침엔 물 몇 방울로 고양이 세수를 하는 문여사는 세안 후 수분크림만 잔뜩 바르면 자기가 예쁜 줄 아는 반푼수다. 물론 그걸로 그녀의 외출 준비도 끝이다.
비 오니 더 예쁜 가을길이다.
오늘 그녀는 아파트 후문 길 왼쪽으로 돌아서 덕정 유적공원을 한 바퀴 돌 생각이다.
10분 만에 덕정공원에 도착한 문여사는 공원에서 이 길을 제일 좋아한다.
덩그러니 혼자 있는 벤치가 외로워 보인다.
문여사는 어지간하면 앉을 스타일인데 그녀도 촉촉한 도를 넘어 축축한 의자는 도저히 안 되겠나 보다.
가을을 제대로 만난 문여사는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긴다.
생선가게를 지나칠 수 없는 고양이처럼 문여사는 산책길에 있는 이 카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시큼한 나이의 여자라 아침엔 커피 한 잔을 마셔야 뇌가 활동을 한다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 문을 연 카페는 이 곳이 유일함을 잘 아는 그녀다.
여기가 어딘고 하면, 그녀의 단골 카페..
'좋아서 하는 카페'는 그야말로 젊은 남자 사장이 지 좋아서 아침 7시부터 문을 여는 곳이다.
그리고 그녀가 이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작은 도서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책들이 많아서이다.
그녀가 어제부터 이 카페에서 읽고 있는 책은 <시 읽기 좋은 날>이다.
산책하기 좋은 날은
커피 마시기 좋은 날이고
시 읽기도 딱 좋은 날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비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여행이 뭐 별건가.
어느 날 내가 사는 동네를 천천히 걸어 다니다 보면
순간 모든 것이 생경하고 심지어 감탄스러울 때가 있다.
그때, 그곳.. 에 나는 여행 중인 것이다.
헉.. 문여사가 이런 말도 할 줄 알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