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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둘 Mar 29. 2023

노을 속 그림

[수필]


  죽음의 마지막 모습은
 인생이라는 단 하루의
황혼녘 부드러운 노을 같은 것이다. 




    어느 날, 통영에 계시는 친정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목소리가 하도 밝아서 좋은 일 있으신가 물었더니 뜬금없이 이러신다. 


  “느그 아부지 하고 내하고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죽을 수 있게 되었다.” 


  무슨 말인가 여쭙기도 전에 어머니는 뒤이어 말씀하신다.


  “요새는 늙어서 죽고 싶어도 맘대로 죽지도 못하는 세상이라 카더라.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누워버리면 법적 보호자가 맘대로 부모를 처리한다 카는데, 늙은이들은 갈 때 되면 가야 안 되겠나마는 자식들이 인공호흡기를 입에 달고 죽어야 하는 부모를 살리 볼라꼬 애쓰는기 옳은 일인가 아인가 모리겠다꼬 느그 아부지랑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은 우리 발로 걸어 다니고 밥도 묵고 멀쩡하지만, 불의의 사고가 생깄을 땐 우짜겠노. 만약 우리 중 누구 한 사람 식물인간이 된다카믄. 그럴 땐 자식들이 문제인기라.”     


  자식들이 문제라니, 


  “생각해봐라, 느그 아부지가 병원에 식물인간으로 누우믄 나는 그 인공호흡기 떼소. 마, 갈 사람 같으면 저세상 가야지요. 카고 호흡기를 떼라 칼끼고 내가 만일 그래 누우 있으믄 느그 아부지도 인공호흡기 떼라 칼끼라. 그래서, 우리 둘이는 병원에서 의료기기에 의지해 목숨 연명 하는 거는 하지 말자. 갈 때 되면 서로 보내주자. 카고 약속했다.”


  “......”


  “한 살 한 살 더 묵어가는데 우리 단속해야지. 맥 놓고 있다가 나중에 우리 가고 나믄 수습을 우짤끼고? 느그한테 짐을 떠맡길 수는 없지 않나. 느그들이 억지로 의료 장비로 사람을 묶어 저세상 가지도 못하게 방해를 하믄 우리는 얼마나 불쌍한 신세고? 그래서 고민 끝에 우리는‘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 카는 거를 작성하고 사인하고 왔다. 우리 죽을라 칼 때 느그는 인자 아무 권한이 없다는 걸 알고 있거라.”


  우리한테 의논도 안 하고 두 분이 가서 그런 걸 작성했다는 것이 조금은 섭섭했지만, 당신들의 뜻을 분명히 밝혀 놓으셨다니 대단하시다. 잠시 생각하는 사이 어머니는 다시 말씀하신다. 


  “우리 죽고 나면 초상 치르는 것도 느그한테 신세 지기 싫다 캐서 상조회에 가입해 놨으니 우리 죽고 나서 느그들은 절대 다투지 말고 아무 걱정 마라.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살다가 하늘이 부르면 조용하게 갈라니까. 혹시, 느그가 부모 때문에 다투는 일이 생기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기라.”


  “우리가 무슨 일로 다투겠습니까, 어머니도 참.”


어머니는 한껏 목청을 돋우시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부모가 죽고 나믄 남은 재산 때문에도 싸우고, 부모 아파 누워 있으면 병원비로 싸우고, 요양원에 가 있으면 요양원비용 가지고도 싸운다. 세상 안 그렇데이. 사는 형편 궁한데 부모 병원비 대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노. 우리가 대책 없이 병원 드러누워서 세월만 좀먹으믄 느그들은 빚더미에서 빠져나올 방도가 없다. 사는 형편 다 고만고만한데 무슨 수로 부모 죽을 때까지 병원비 감당 하겠노. 긴 병에 효자 없다카는 말이 그래서 있는기라. 그래 됐으니 알고 있거라.”     


  친정 부모님이 병원 신세를 지거나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있으면 딸들의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아프거나 치매가 온다 해도 걱정이 되는 건 돈이 먼저이지 부모님의 안위가 아닐 수도 있다. 


  그동안 부모님들이 몇 차례 수술하고 치료받으러 다니셨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딸들은 병원비용 지불 한 적이 없었다. 두 분이 알아서 하셨기 때문이다. 어디 아파서 수술해야 한다는 전화가 올 때마다 병원비는 당신들이 준비하셨다는 이야기를 미리 하시는 것도 자식들이 당신들로 인해 금전적으로 부담을 가질까 걱정 덜어주려는 뜻이라는 걸 모르지 않는다. 우리 네 자매가 그럭저럭 다툼없이 지내는 것도 어쩌면 이런 생각으로 노년을 스스로 챙겨 가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그런 것 아닐까 싶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사람이 어떻게 조절할 수 있으랴. 그래서 옛말에 사람의 일은 하늘의 뜻이라고 했는데 요즘 들어서는 태어남과 동시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자본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제는 아이를 한둘 낳는 세상이지만 그 전처럼 쉽게 목숨 잃을 일이 없으니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란다. 하지만 자녀들은 일찍부터 독립하여 멀리 떠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식에게 기댈 자리가 애초부터 없게 된다. 간혹, 어버이날이나 생신, 명절 때 전화 한 통쯤 받거나 계좌로 용돈을 받으며 자녀들의 흔적을 애써 느끼는 것으로써 부모의 노년은 자식과 평행선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럴 때, 부모의 병은 과연 자식들에게 슬프고 절절한 애달픔이 될 수 있을까. 병원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평소에 물질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은 부모라 할지라도, 부모의 절명 순간 의료 연명장치를 해서 계속 목숨 이어가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는 보수적인 세상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 우리 모두 서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부모님은, 언젠가 만나게 될 그 죽음의 문턱에서 적어도 스스로 자기 삶을 마감 지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려는 당당함의 의사를 표한 것이리라. 그분들은 당신들의 죽음을 미리 스케치하셨다. 돌아가신 다음 매장하느냐 화장하느냐를 결정하셨고, 돌아가신 다음 장례 절차도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을 결정해 놓으셨다. 그것이 자녀들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라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은 장엄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죽음의 마지막 모습은 인생이라는 단 하루의 황혼녘 부드러운 노을 같은 것이다. 친정어머니와 아버지의 노을 속 그림을 그려본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통해 아름다운 생명을 이 땅에 내려놓을 준비를 마치신 분들. 이것은 부모님의 뜻하지 않은 생을 결 곱게 가다듬어줄 마지막 빛깔이 되어 줄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마지막 노을 속에서 편안하게 이승에 이별을 고할 부모님을 우리 네 자매는 슬프지만, 웃으면서 떠나보내 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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