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나의 할머니에게_흑설탕캔디, 백수린, 74 /240>
아침부터 도넛 생각이 간절했다. 설탕을 가득 뿌린 시나몬 도넛 한 입 베어 물고 뜨거운 블랙커피 한 모금 넘기면 오늘치 기쁨을 충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수도 하지 않고 모자만 푹 눌러쓴 채 도넛 가게로 향했다. 집에서 도보로 십 분 거리였다. 어느 집 석류나무에 소행성처럼 열려 있는 새빨간 석류 열매를 구경하느라 오 분이 더 걸렸다. 별처럼 반짝였다. 집주인은 왜 주렁주렁 열린 석류를 따지 않을까. 비가 오면 금방 다 떨어질 텐데. 아까워서 내가 다 발을 동동 굴렀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열매 달린 걸 알아보기에 너무 바쁜 사람이거나, 다음 열매가 열릴 때까지 또 기다릴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이거나. 어떤 열매는 ‘아-’하고 입을 벌리듯 단단한 과피를 열고 빨간 알갱이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꼭 사람의 머리를 쪼개 놓은 듯했다. 한 입 베어 물면 시뻘건 과즙이 턱을 타고 흘러 가슴까지 줄줄 흘러내리지 않을까. 영화 <한니발>에서 렉터 박사는 FBI 요원 크렌 들러를 납치해 두개골을 횡단으로 잘라 뇌를 꺼낸 후 프라이팬에 구워 요리한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뇌를 맛있게 먹던 크렌들러의 모습이 왜 그 시점에 떠오르는 건지, 내 안의 잔인성을 발견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어릴 때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칼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내가 칼에 다칠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칼로 누구를 해할까 봐 그런 거래"
일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누구도 동의하지 않아 혼자 불안했다. (나...나.. 사이코 패스인가) 그 말은 오래오래 뇌리에 남아, 나도 모르는 사이 칼을 들고 누구를 해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오래전부터 내가 ‘나’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나 아닌 다른 것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에 자주 몰입했다. 나의 착각과 달리 어쩌면 ‘칼’은 하나의 은유였을지 모른다. 내가 상처 받는 것보다 누군가에 상처 입힐까를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물론 나는 아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귀한 존재일 것이다.
남의 집 석류를 따 먹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고 도넛 가게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설탕 덩어리가 당긴 사람들이 나 말고도 많아서 한참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커피를 주문하면 몇 분 더 기다려야 한대서 집에 돌아와 내려 마셨다. 기다린 만큼 도넛은 달콤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아무리 오래 음미하고 싶어도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십 분의 달콤함을 만끽한 뒤 온종일 누워있었다. 오늘은 생리가 터진 지 둘째 날이었다. 누가 처음 생리를 ‘터졌다’고 표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언어의 귀재가 분명했다. 생리가 터지면 짜증도 터지고 때로 눈물도 터진다. 낮 동안 <나의 할머니에게>라는 소설집에 실린 백수린 작가의 <흑설탕 캔디>를 읽다가 펑펑 울었다. 몸에서 빠져나간 빨갛고 투명한 액체의 부피만큼 외로워졌다. 생리를 기분의 변명거리로 삼지 말자고 일기에 썼건만, 몸은 99%의 확률로 마음을 굴복시킨다.
Y에게 오늘은 백팔 배를 건너뛰면 좋겠다고 말했다. Y가 그러자고 했다. Y의 등허리를 뒤에서 안고 ‘피가 나면 왜 외로워지는 거지?’ 하고 물었다. 생리가 뭔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Y는 ‘외로워?’ 하고 내게 되물었다. 그러고 나서 냉장고에 소분해 둔 하얀 순무로 밥을 지었다. ‘무밥, 무 봤나?’ 농담도 잊지 않았다. 올해로 만난 지 십 년쯤 되었는데 여전히 Y는 매일 사랑 고백을 한다. 내 몸과 마음이 힘들 때는 밥을 지어준다. 반면 나는 바늘 같은 말과 행동으로 그에게 상처 줄 때가 있다. 그때도 Y는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고. 다 잘 될 거라고. 나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Y와의 달콤한 시간도 언젠가는 도넛처럼, 석류처럼 사라져 버릴 거라는 생각에 울적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을 절대 놓치지 말자고 생각한다. 피가 날 때도 눈물이 날 때도 누군가 곁에 있는 것, 일단은 그것만 생각하자고.
밥과 함께 찐 무는 도넛보다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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