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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29. 2020

빈말과 진심


 친정과 시댁에 안부 전화를 안 한지 일주일이 넘었다. 이유 없이 연락하기를 계속 미루고 있으면 양가 어머님들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밥은 잘 먹고 다니나, 아픈 데는 없나, 잘 살고 있으니까 별 연락이 없는 거겠지. 


 지구 반대편에서 엄마의 마음을 감지하는 걸 초능력이랄 수 있을까.  


 오래 전,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토끼들을 데리고 세상 잔인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은 갓 태어난 새끼 토끼들을 어미 토끼와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잠수함까지 동원해 북대서양 심해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한 마리씩 죽였다. 자기 새끼가 죽을 때마다 어미 토끼의 뇌파가 요동쳤다는 게 실험의 결과였다. 어미와 새끼의 탯줄이 끊긴 이후에도 ‘정신의 탯줄’은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해석이었는데, 모성에 대해 조금만 사유했더라면, 윤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그런 실험은 할 필요조차 없지 않았을까. 



 아무튼, 텔레파시라는 게 결코 허무맹랑한 초심리학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우리 몸에 전류가 흐르고 온갖 전기 신호들이 뇌를 자극하고 있다. 출력과 입력의 반복, 그것이 우리의 하루다.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미래에는 뇌 자체가 통신수단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상대방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쉽게 전달할 수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서로의 생각을 정확히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오해와 갈등은 줄어들까, 아니면 더 심화될까.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발코니가 엉망진창이었다. 화분이 쓰러지면서 흙이 여기저기 쏟아져 있었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남편 말로는 지난 밤 태풍이 심하게 불고 천둥 번개도 쳤다고 한다. 나는 세상모르고 잤다. 써 놓고 보니 '세상모르고' 라는 말이 좋게 들린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세상모르게 하고 싶다. 



발코니를 청소하고 마운트 호손Mount Hawthorne에 갔다. 너세니얼 호손 Nathaniel Hawthorne을 연상시키면서, 어쩐지 문학적 향취가 느껴질 것 같은 동네이지만 퍼스에 그런 곳이 있을 리 없다. 호주의 뿌리는 영국인데 언어 외의 문화, 예술적 영향은 거의 받지 않은 것 같다. 시드니나 멜번에 가 봐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대도시의 상징성처럼 세워져 있을 뿐, 이 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은 발견하기 힘들다. 나는 그 원인을 다른 국가에 비해 덜 파란만장한 호주의 역사에서 찾곤 했다. 호주만큼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경우 독립 전쟁, 남북 전쟁, 세계 대전, 대공황 등을 거치며 나름대로 단기간에 정치적, 경제적인 정체성을 구축해나갔을 뿐 아니라 그 가운데 꽃 핀 문화와 예술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반면 호주는 원주민과 백인과의 갈등 외에는 이렇다 할 만 한 역사적 사건 없이 비교적 평화롭게 지금의 사회를 이뤘다. 물론 이곳에도 정치적 대립이 있지만 대한민국 신문과 뉴스에서 목격하는 일에 비할 데가 아니다. 호주 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창작물이 원주민들의 작품이라는 것도 주목해볼 만하다. 싸움이 사라지면 예술도 사라지게 될지 궁금하다. 어쩌면 더 훌륭한 작품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찾은 마운트호손과 내가 사는 마운트롤리 지역은 얼핏 봐서는 별로 다를 것 없어 보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나이 들수록 완전히 새로운 것에서 자극을 느끼기보다, 비슷해 보이는 가운데 다른 점을 찾아내는 재미를 느낀다. 매일 가는 카페이지만 거기서 나누는 대화, 관찰한 것, 그날의 분위기는 매번 다르다. 세심한 차이가 발견되는 순간을 사랑한다. 가령, 우리는 오늘 마운트 호손에 있는 ‘마운트 롤리 카페’에 갔다. 우리 집 코앞에도 있는 프렌차이즈 카페지만, 우리 동네 지점은 오래 앉아있기에 불편하다. 누가 걸어 다닐 때마다 마룻바닥이 들썩거리는 것도 영 신경 쓰인다. 그래서인지 카페 내 앉아 있는 사람보다 빵이나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가는 사람이 많다. 반면 마운트 호손의 카페는 카운터가 있는 공간과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따듯하고 온화한 조명 아래 푹신한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좋고, 커피를 서빙하는 점원 외에는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없어서 책을 읽거나 일기 쓰기에 훨씬 집중이 잘 된다.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고 생각될 때마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미묘한 차이를 발견한다.      


 이곳에서 오늘은 박완서 작가의 글을 반 페이지 정도 필사했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라는 단편 중 한 구절이었다.      



“남을 위해 나를 속이기가 싫어요. 무엇보다 피곤하니까요. 가장 쓰잘데기 없는 걸로 진 빼기 싫어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_박완서>     



‘전화 바꿨습니다. 어쩐 일이세요?’ 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전화 받은 사람’의 독백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전화를 한 사람보다 받은 사람의 용건이 훨씬 더 잘 드러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관계는 동서지간이다. 시댁 조상들의 제삿날이 다가오면 동서가 형님에게 미리 언질하곤 했는데, 깜빡하고 동서가 기별을 잊는 바람에 증조모의 제삿날을 그냥 넘어간 거였다. 


 동서를 나무라기 위해 전화 한 형님은 도리어 그에게 속사포 잔소리를 듣게 된다. 시댁 증조모까지 챙길 필요가 무어있냐, 형님 동네엔 먹자골목이 있어서 알아서 속세 음식 맛보고 가셨을 것이다, 이제부터 저를 믿지 마시라. 그러면서 혼잣말 같은 인생 한풀이 같은 게 시작되는데 결국 독백의 요점은 위 문장이다. 

 남을 위해 나를 속이기 싫다. 쓰잘데기 없는 걸로 진 빼기 싫다. 

 솔직해지고 싶다는 말이다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화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의 이유가 통곡처럼 펼쳐진다. ‘기를 쓰고 꾸민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놓여난 것 같은 해방감’  그것이 화자가 증조모님 제삿날을 까맣게 잊어버린 이유였다. 

 소설을 읽고 나서 솔직하지 못하다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거짓말 뿐 아니라 ‘빈 말’도 솔직하지 못한 말일 것이다. 언제 한번 밥 먹자, 괜찮아 잘 될 거야, 오늘 너 참 예쁘다/ 젊어보인다, 대단하세요, 정말 멋있으세요,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 나 좋자고 하는 말, 뭔가 얻기 위해서 하는 말, 자세히 보면 아무 의미 없이 감정과 에너지만 갉아 먹는 말. 물론 빈 말은 선의의 거짓말처럼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말이지만, 어떨 때는 그게 우리가 하는 말의 전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주 친하다고 하는 사이끼리도 빈 말 없이는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 시댁과의 통화가 불편한 것은 시어머니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서먹서먹하고 할 말이 없으니까, 빈 말을 자꾸 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에게도 시댁의 2대 조상을 챙기는 일도 ‘빈 말’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끝말잇기를 했다. 내가 먼저 시작했다.      



-쵸코파이

-이발소     


- 소름

-.........그렇게 게임을 끝내면 어떡해!     



남편이 웃으면서 말했다. 미정아. 게임을 즐기자고 하는 거지, 이기려고 하니. 핑퐁처럼 왔다갔다, 주고받아야 재미있는 거지. 맞다. 다 즐겁자고 하는 건데, 매사에 나 혼자 진지하게 달려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녁 식사 전 시어머니께 영상 전화를 드렸다. 머리를 염색하셔서 그런지 건강해보이셨다. 목소리 한번 들려드리는 거 별 거 아닌데 왜 그렇게 주저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어머님을 참 좋아하는데. 어머님이 남편에게 말씀하신다. 늬 와이프 참 착하다, 맛있는 거 사 줘라, 니가 요리하는 거 말고 밖에서 스테이끼 같은 거 사 줘라. 좋은 데 바람도 좀 쐬고 재미있게 살어라. 그런데 너는 느이 서방 뭐가 그렇게 좋노.      

- 잘생겨서요.      



아무래도 솔직하게 살기는 힘들 것 같다. 생각해보면 오늘의 빈말이 내일은 진심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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