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모르는 작은 생명이 나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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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싸개와 신생아용 바디수트를 샀다.
금방 작아지고 필요 없어질 물건들을 하나씩 사 모은다.
착착이(태명)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커 버린다는 게 아쉽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덧,
스무 살이 된 착착이를 상상하고 있는 나.
어제 아침에 잠에서 깨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문득,
사는 데 사랑과 이별 말고 중요한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두 가지가 인생의 전부인 것 마냥 느껴졌다.
'어차피 죽을 거 왜 살지' 하는 질문이 들 때도 간혹 있었는데
(- 인생에 대한 회의에서라기보다 호기심에서)
지금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냥 있는 힘껏 사랑하고,
있는 힘껏 헤어지는 게 삶이고
그 외의 일들은 다 사족처럼 여겨진다.
운이 좋아 좋은 배우자를 만났고
덕분에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알게 됐다.
그러나 이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배울 기회는 아직 없었는데,
이제야 아주 멀리서 (혹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손 흔들며 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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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빠가 손바닥만 한 쪽지에 쓴 유서를 보여줬다.
환갑이 넘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기니 죽음을 자주 생각해 보게 됐고 그러다 그냥 생각난 김에 미리 써봤다고 했다. 우리는 마주 보며 마치 전에 해본 적 없는 애정표현을 나누기라도 한 것처럼 멋쩍게 웃었다. 아빠는 죽는 게 무섭지 않다고 했고 나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 옥신각신 하다가 그러다 또 웃었다. 전화를 끊고는 약간 눈물이 날 뻔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나는 만류하지 않는다. 피하지 않고 알고 싶다. 있는 힘껏 이별하는 방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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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착이를 만나는 순간은 한 몸이었던 우리가 분리되는 순간이기도 할 터. 그날이 어쩌면 내가 최초로 배우게 될 이별의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아이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보호자가 되겠지만, 동시에 인생을 먼저 살아본 경험자이자,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갈 파트너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이 아이에게 고작 먹는 법과 자는 법을 가르치겠지만, 이 아이는 내게 그 두 가지와 비교도 되지 않는 중요한 무언가를 가르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이를 종교 대신 믿게 될는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는 여전히 믿지 않으면서도, 누군가 아이가 신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는 거라면 믿을지도 모른다.
잡화점에서 산 불상의 자리에 곧 아이가 누워 있게 될 것이다. 자고 있는 아이 옆에서 백팔배를 하게 될 미래를, 그저 상상하기만 해도 은혜롭다. 그런 생각을 하면 임신 중의 힘든 시간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된다. 한참 밖에서 놀다가 아랫배가 딱딱해져서 드러눕게 돼도 몸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있다.
얼굴도 모르는 생명이 여전히 어린 나를 키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