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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료 Oct 11. 2021

내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들,





*


 임신을 하고 나니 한국 생각이 간절하다.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사람들, 가고 싶은 곳이 시시때때로 생각난다. 하지만, 한국에 있다고 한들 코로나 19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실정이니, 확진자 0명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마스크 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기쁨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돌아보면 코로나 19 이전의 시기부터 나는 비자발적인 고립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호주로 이사오면서 한국에서 맺었던 모든 인간 관계는 온라인 인연이 되었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웠다. 그러나 연락이나 만남의 빈도수가 관계의 농도나 깊이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걸, 진정한 인연이란 평생을 못 보다가 죽기 전에 한번 봐도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갑고 편한 관계라는 걸 오히려 깨닫기도 한 시간이었다.  


 외로울 때마다 누군가에게 연락 해서 신세 한탄을 하고, 물건을 사서 나를 치장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로 어떻게든 해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시적인 만족보다 영구적인 기쁨을 원했다. '이민'이라는 비자발적 고립 기간 동안, 이전에 제대로 눈여겨 보지 못했던 것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늦은 밤 침대에 누워 무심코 창밖을 바라봤는데 

그 자리에 커다란 달이 떠 있을 때,  



인도양 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꼴까닥 넘어갈 때, 

한여름 옷을 훌러덩 벗고 

누군가에게 안기듯 바닷물로 풍덩 뛰어 들 때, 

햇살에 반사된 바닷물이 

수면 아래 모래 바닥 위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 때,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주변이 별처럼 빛날 때, 

늦은 오후 커다란 새들의 무리가 

줄을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때,

 비온 뒤 유칼립투스 향이 온 세상에 진동할 때, 

우기가 되는 겨울, 하루에도 두세번씩 무지개가 뜰 때, 

한낮의 공원에서 오리가 낮잠을 자고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며 달려갈 때, 



그런 순간 순간들이 내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웠다. 


누군가의 말과 위로와 공감은 한시적인 것이지만, 자연의 위로는 영구적이었다. 게다가 언제나 손만 뻗으면 닿는 자리에 있었다. 빈 곳간에 곡식이 차듯, 지치고 힘들었던 마음에 좋은 에너지가 쌓이게 되니, 아이가 생겼어도 부담을 느끼기보다, 내가 느낀 이 모든 아름다움을 아이에게 알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먼저 설레게 됐다. 





*



 어제 저녁, 남편과 공원을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8시 밖에 안 됐는데 공원은 새벽처럼 조용했다. 작은 가로등 하나가 너른 잔디밭을 훤히 밝히고 있었고, 불빛 아래 한 여자가 나이 든 개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내가 스트레칭 운동 기구에 올라서자 와이가 위험하다며 말리려는 찰나, 여자가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 달을 봐. 비현실적으로 커다래.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우리가 서 있었던 자리에는 큰 나무 때문에 보이지 않던 눈썹달이 정면으로 떠 있었다. 가느다란 달의 밑부분 위로 누군가 붓으로 그린 것처럼 얇고 희미한 구름이 은은하게 펼쳐져 있었다. 달을 본 내가 기뻐하자 여자가 말했다. 



이 밤에 나 혼자 저걸 보고 있는데, 와, 너무 아름다운 거야.

이걸 나 혼자 보면 안 되는데,

누군가 와서 좀 봐야 하는데, 하는 순간에 너희들이 나타났지. 

정말 특별한 이브닝이야. 



우리는 함께 달을 보며 감탄하다, '빌리'라 불리는 할아버지 개를 어루만졌다. 개는 발라당 배를 까고 네 다리를 허우적 거리며 처음 보는 우리에게 마음을 열었다.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런 순간이었다. 그런 순간은 뒷뜰에 핀 이름모를 풀꽃이 피어나듯 조용히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고립'과 '혼자'가 익숙해진 자에게만 오는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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