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17일 차.
*
착착이의 이름을 '해오'로 정했다. 한참 배우 유태오에 취해 있을 때, '태오'라는 이름을 1순위에 두었었는데, 어쩐지 과하게 세련된 걸 꺼려하는 와이는 탐탁지 않아했고 'ㅌ'이 주는 거친 소리 대신 부드러운 소리가 들어가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름의 의미가 '대범하고 자유로운' 느낌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은 그렇지 못하다면서. 그리하여 '태오'를 향한 나의 미련과 아빠의 바람을 섞어 '바다 해'와 '밝을/깨달을 오' 자를 써, 이 아이를 평생 '해오'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름을 지어놓고 보니 호주 사람들이 발음하기에 '해'가 어렵지 않을까 우려됐다.
그러다 의문이 들었다.
[우리 애 이름 정하는데,
왜 서양 사람들이 발음하기 쉬운지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지]
내 안의 반항기가 작동하면서 일부러라도 영어 이름은 짓지 않고 싶어졌다. 아무리 어려운 발음의 이름이라도 부르다 보면 익숙해지는 법. 우리 아이가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출산 후 집을 방문했던 간호사도 비슷한 얘길 했다.
[우리 딸 이름이 앨리스예요.
그런데 앨리스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앨시/앨리... 자기들이 편한 대로 부르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냥 원하는 이름으로 짓는 게 어떨까요?]
네 이름을 최대한 정확히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길.
호주의 바다처럼 넓고 밝은 인생을 살길.
병원 퇴원 이후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한테 알렸을 때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축하해]
[그런데 호주는 산후 조리원도 없고, 친정 엄마도 없어서 어쩌냐...]
나도 그 점이 매-우 걱정이었다. 호주는 자연 분만을 하면 하루 만에, 제왕절개는 3일 후 퇴원을 시킨다. 그렇게 일찍 집으로 돌아와서 육아의 이응 자도 모르는 남편과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잘 적응했다.
집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까지는 정신없이 지냈다. 나는 잘 나오지 않는 젖을 물리기에 바빴고, 남편은 무얼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댔다. 의견 차이로 티격태격하다, 긴급회의를 열어 각자의 역할을 정확히 분담했다. 나는 수유와 아기 컨디션에 집중하고, 와이는 아기보다는 집안일과 나의 삼시 세 끼에 집중하는 것으로.
그렇게 3일 정도 지나자 우리 둘의 손발이 맞아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유가 생겼다. 수유 텀이 긴 틈을 타, 유튜브 영상 편집을 하고 독서노트를 썼다. 통잠은 자지 못했지만, 이리저리 쪼개서 하루에 8시간 정도 잤다. 밤중에도 시시각각 아기 옆에서 보초를 서며 온갖 걱정과 고민을 떠안던 남편은 통잠을 자게 두었다. 필요 이상의 걱정은 육아를 망치고, 산후 도우미의 체력은 중요하며 남편은 육아보다는 살림력 레벨이 더 높으므로)
해오가 순한 아이여서 적응이 한결 쉬웠을 수도 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산후 조리원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셋이 합을 맞췄기 때문에 순한 신생아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해오는 인생 17일 차.
만일 산후 조리원에 갔더라면, 모든 것이 이제 시작이고, 적응 기간은 더 오래 걸렸을 듯하다. 엄마들 사이에서 자연분만은 선불제, 제왕절개는 후불제라는 말이 있는데 비슷한 맥락으로 모자 동실은 선불제, 산후 조리원은 후불제....라고 바꿔보고 싶다. 미리 고생하면 나중이 편한 게 아닐까.
*
분만 전 이틀을 가진통 때문에 잠을 설쳤다. 분만 당일엔 모유 수유 때문에 거의 못 잤다. 퇴원해 집으로 돌아와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럼 엄마는 언제 쉬냐고 묻는다면,
틈틈이 쉬었다.
낮에 아기가 잘 때 같이 잤다. 마지막 수유는 남편에게 유축 수유를 맡긴 뒤 9시쯤 일찍 잠들었다.
그러면 4시간은 쭉- 잘 수 있었다.
몸은 저절로 회복됐다. 무통 주사로 인한 부기는 닷새만에 빠졌다. 몸무게는 2주 만에 임신 전 체중으로 돌아왔다. 훗배 앓이나 회음부 절개 후유증도 일주일 만에 사라졌다. 변도 시원하게 본다. 개인적으로 가만히 누워있기보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 활동을 하는 게 회복에는 더 좋은 것 같았다.
임신을 결심했을 때부터 몸 망가지는 거엔 별로 연연하지 않았다. 아기를 열 달 동안 품어 낳은 몸인데
비싼 돈 들여 관리해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출산으로 몸의 기능이 퇴화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출산을 하지 않는 몸이라 해도 어차피 나이가 들면 노화와 함께, 몸은 삐그덕 거리기 마련인 거고.
가슴 처지는 것도 고민거리가 되진 않는다. 외모나 몸매를 가꾸는 게 그다지 내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산후조리보다 산전 관리가 더 중요하다, 는 말은 사실이었다. 임신 당뇨가 아니었더라면 나도 식단 조절이나 운동을 놓고 살았을 것이다. 임당 덕분에, 무거운 몸으로 출산 전날까지 운동을 한 게 회복에 큰 도움이 된 거 같다. 임신했을 때 매일 15분이라도 걷고 식단 조절을 한다면 몇백만 원 하는 산후조리는 필요 없을지 모른다.
솔직히 나는 산후조리 비용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재정적으로 넉넉하면 상관없겠지만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서 무리해 갈 필요까지는 없는 것 같다. 나라면 그 돈으로 1:1 필라테스나 요가 수업을 듣거나, 비싸면서 건강한 오가닉 음식을 먹거나 집 안의 가전제품을 바꾸겠다.
요즘에는 유튜브에 신생아에 관련된 온갖 정보가 많아서 궁금한 걸 검색하면 웬만한 건 다 나와있다. 자료 조사한 걸 바탕으로 실전에 적용해 보고 하나씩 실전에 응용해 나가면서, 육아에 조금씩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누군가에 의지해서 수동적으로 움직이느냐, 내가 직접 부딪혀 시행착오를 겪으며 능동적으로 배워가느냐, 에 따라 육아 생활이 달라지는 것 같다.
아기에 대해서는 엄마가 제일 잘 안다, 는
말을 줄곧 떠올렸다.
신생아 육아에 아무리 경험 많고 연륜 있는 전문가라도 10개월 동안 아기를 품고 직접 낳아 24시간 하루 종일 아기를 관찰한 엄마보다는 아기를 더 잘 알 턱이 없다고 믿었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인 얘기다. 누군가는 산후 조리원의 혜택을 만족스럽게 누릴 것이다. 나는 분만 후부터 모자 동실을 하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이곳의 시스템이 잘 맞았다. 아기가 가장 작고 예쁜 시기인 3주 차까지 내내 붙어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배고플 때, 심심할 때, 졸릴 때의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하며 아기의 패턴을 관찰하는 것도, 어떻게 하면 모유 수유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도, 힘들긴 했지만 호기심 많은 내겐 즐거운 일이었다.
모유 수유를 할 때는 숫자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다. 양쪽 각각 15분을 물려야 한다든지, 하루 수유량을 **ml에 맞춰야 한다든지, 트림은 몇 분 동안 시켜야 한다든지, 기저귀는 몇 번을 갈아야 한다든지.
그냥 아기가 배불러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지 배가 아파서 찡그리고 있는지 기저귀가 축축해서 불편해하고 있지 않은지, 정도만 확인하면 됐다. 적게 먹어도 매주 몸무게가 늘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애바애'라는 말은 육아 용품에만 쓰이는 게 아니라, 성장 발달에서도 쓰였다. 전문가들이 얘기하는 '표준'에 맞출 필요는 없었다. 태어나는 몸무게가 다 다르듯, 성장에 필요한 요소들도 제각각이었으니까.
*
Don't read too much,
read your baby.
방문 널스가 우리에게 처음 해 준 말이었다.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온갖 '카더라' 정보들을 읽기보다, 아기가 보내는 신호를 읽으라고 했다. 부모가 아기에 대한 사랑과 애정만 있으면 그 걸로 아기는 충분히 잘 자란다고 했다. 모르는 게 있으면 블로그를 검색하거나 맘 카페에 묻기보다 내가 신뢰하는 전문가한테 문의하는 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며 정확한 방법.
걱정과 고민은 정말 큰 에너지가 든다. 스스로 부족한 엄마라고 느끼게 만들고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한다. 출처 없는 '카더라' 정보에 의지하는 시간을 아기를 관찰하는 데 쓰면 더 좋은 것 같다.
아기는 생각보다 잘 자란다.
방문 널스가 이런 말도 해 줬다.
'야생에서도 전쟁터에서도
아기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먹어야 하는지, 얼마나 자야 하는지, 소변과 대변은 얼마큼 싸야 하는지, 엄마한테 어떻게 불편함을 알려야 하는지, 언제쯤 훅 성장해야 하는지. 우리도 그런 식으로 자랐을 것이다.
예전에 블로그에 '우리에겐 서로 빚이 없다'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자식에게 뭔가 더 해 주지 못해, 한없이 미안해하는 부모의 마음에 대해 쓴 글이었다.
우리가 호주로 이민 올 때, 양가 부모님들의 마음이 꼭 그랬다.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서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미 필요한 것은 다 얻었고, 얻고 있는데 왜 미안해하는 걸까. 부모 자식 간에 생기는 이 부채감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걸까.
나중에는 부모님의 미안한 마음이 오히려 내게 부담이 됐다. 그 마음은 분명 사랑에서 나왔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정적인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님이
'내 평생을 바쳐서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최선을 다 해서 해줬어.
이제 네 두 발, 두 손으로 살아 봐'
하길 바랐다.
어미 새가 아기 새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둥지 밖으로 떠미는 것처럼. 빈 손으로 둥지 밖에 나가는 게 두려웠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훨훨 잘 날아갈 자신이 있었기에 눈물보다는 씩씩하고 담대한 응원이 필요했다.
'너도 부모가 되면 이해할 거야'
시간이 더 지나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자식 입장에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해오에게 미안하단 마음을 잘 갖지 않게 된다.
임신했을 때도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고, 도와주는 이 하나 없는 먼 호주 땅에서도 신생아 육아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고 스스로 기특해한다. 그리고 내가 최선을 다하는 만큼 해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는다. 해오도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육아는 아기와 나의 팀워크다.
나만 아기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아기도 나를 키운다.
조용한 새벽에 일어나, 간신히 눈을 떠서 고 작은 몸으로 있는 힘껏 젖을 빨고 헥헥거리면서 소화를 시킬 때,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르겠다. 살아있는 것은 다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걸 배울 수 있었던 건 보름 내내 해오와 오래오래 붙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
몸조리는 좀 소홀했을지 몰라도
마음 조리는 단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