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상이 Oct 20. 2017

PIGGYBOOK

그래도 사랑

PIGGYBOOK      

● Anthony Browne    


    

Mr. Piggott lived with his two sons, Simon and Patrick, in a nice house with a nice garden, and a nice car in the nice garage. inside the house was his wife.  

  

 Piggott 씨는 좋은 차와 훌륭한 정원이 딸린 집에서 두 아들과 살고 함께 살았다. 좋은 차는 좋은 차고 안에 있었고, 집안에는 아내가 있었다.  Piggott 씨 부인은 마치 자동차가 차고 안에 있는 것처럼 “inside the house was his wife 집안에는 아내가 있었다.”라고 하고 있다.

     

우리도 부인을 아내, 안사람, 집사람이라 호칭한다. 이 말의 어원은 집안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놀랐던 점이 이 부분이다. 소위 서구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아내를 이렇게 여기는 구나..

 

 "Hurry up with the breakfast... he calld every morning before he went off to his very important jab..... their very important school." 

    

매일 아침 세 남자는 “빨리 밥 줘” 이렇게 소리쳤다.

왜냐하면 Piggott 씨는 중요한 일을 하러 가야 했고 두 아들 또한 중요한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좋은 차를 타고 중요한 일터와 중요한 학교로 갔다.

Piggott 씨 부인은 이들이 중요한 일을 하러 간 뒤에 집에 남아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침대를 정리하고 버스를 타고 일터로 갔다. 부인은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인의 얼굴은 집안일을 할 때도 버스정류장에 서 있을 때도 어둔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아예 눈 코 입을 그려 넣지 않았다.

그림책 속에서 좋은 옷을 입고 뽀얗게 살이 올라 얼굴이 환한 Piggott 씨와 부인과 두 아들은 한 가족이 아닌 것만 같다. 아내이며 엄마인 이 여자는 차고에 있는 좋은 차보다도 못한 낡은 가구처럼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저녁이 되면 이 세 남자는 중요한 일터와 중요한 학교에서 돌아와 또 소리쳤다.

 “Hurry up with the meal, Old girl,”

 이번에는 ‘Old girl’이라고 까지 한다. 이걸 어떻게 해석하나. 늙은 여자라고 해야 하나.

  “여편네야 빨리 밥 줘!”  “어이 아줌마 빨리 밥 차려!” 이런 뉘앙스일 것이다.    

 아빠와 두 아들. 이 세 남자는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소리치며 소파에 앉아 있다.

 Piggott 부인은 퇴근 후에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세탁기 돌리고, 다림질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준비해 놓아야 하루 일이 끝난다. 그때까지 세 남자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TV를 볼뿐이다. 한국의 아빠들은 아마 야근이나 회식을 하고 아이들은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어느 날 세 남자가 평소처럼 집에 돌아왔을 때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항상 집에 있어야 할 Piggott 부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부인은 집에 없었다. 벽난로 위에는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편지에는 “ You are pigs ” 단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돼지새끼들아! "

오죽하면 남편과 내 아들들에게 이런 심한 말을 하고 가출을 했을까.

내가 20년 전쯤에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작가분이 남자라는 사실에 놀랐었다. 

     

영국에서 태어난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 1946~)은 1976년 『Through the magic Mirror 』를 발표하면서 동화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83년 『Gorilla 』와 1992년 『ZOO』로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두 번이나 받았으며, 2000년에는 그림책의 최고 영예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주제 의식이 묵직한 내용이 많지만 동물 캐릭터들의 유머러스하고 화려한 일러스트 때문에 판타지로 분류되기도 한다. (http://www.anthonybrownebooks.com)  

      

Piggott 부인이 가출한 후 세 남자의 얼굴은 돼지로 변한다. 집안 곳곳에 물건들은 돼지 형상으로 변한다. 그림책 속에서 숨은 그림 찾듯이 돼지들을 찾아내는 것도 재미있다.

돼지들이 살고 있으니 집안은 금세 돼지우리가 되었다.  

   

아버지와 아들뿐 아니라 구름도 달도 나무도 시계도 커튼의 무늬도 사랍 손잡이도... 돼지로 변했다.  


국적과 인종이 달라도 사람 살아가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이 변해도 사랑하고 자식 낳아 먹이고 가르치며 아등바등 사는 인간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잘났든 못났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기혼이든 비혼이든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

기술 과학 문명이 발전한다고 해도 집안일을 안 할 수는 없다.

일상은 매일 반복되고 집안일은 먹고 치우고 청소기 밀고 세탁기 돌아가듯 끝없이 돌고 돈다.

로봇이 대신한다 해도 또 인간의 몫은 남을 것이다.     


돼지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Piggott 부인은 집으로 돌아왔다.

돼지처럼 집안 구석구석 먹을 것을 찾고 있을 때 문이 환히 열리면서 마치 성모 마리아 같은 그림자가 바닥에 엎드린 세 남자 앞에 나타났다. 

"구세주가 오셨다."  

세 남자는 무릎을 꿇고 “ P-L-E-S-E- come back,” 그분께 애원했다.  

그때서야 마치 구름 속에서 해가 비추듯 Piggott 부인의 얼굴이 환하게 반쯤 드러났다.  

 

Mr. piggott 씨와 두 아들은 이제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들은 설거지도 하고 침대 정리도 하고 요리도 할 줄 아는 남자들로 변했다. 

동화책 속에서는 잠깐 책장 넘기자 남자들이 달라졌지만, 우리 현실에서 남자들이 부엌으로 오기까지는 백 년도 더 걸렸다.  

Piggott 씨 부인이 소녀처럼 빨간 티에 블루진 오버올을 입고 차고에서 차 정비를 하고 있는 그림이 이 동화책의 마지막 장면이다.

    

집안일을 하는 아내와 엄마의 존재는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어서 그것이 사라졌을 때만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 어릴 때에 이런 미세먼지 공포 속에 살게 될 줄 생각조차 못했듯이. 저 눈부신 푸른 하늘을 잃어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맑은 공기는 언제든 호흡하면 거기 있을 줄 알았다. 공기청정기가 정수기가 없으면 안 되는 세상이 올 줄 꿈에도 몰랐다. 아내와 엄마는 그런 존재다 (물론 아버지도 남편도 그런 존재다.)


원하든 원치 않든 지금은 여자들이 집안일만 하면서 사는 시대가 아니다.

바깥양반이었던 남자도 바깥일만 하고 살 수 없게 되었다. ‘남자들은 당연히 밖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공식도 깨져버렸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에는 몰랐다. 내가 어떻게 소중한 학교와 소중한 직장을 맘 편히 다닐 수 있었는지를.

항상 정돈된 집안과 배고프다 외치면 항시 대기 중인 음식들이 어떠한 수고로 만들어지는 지를.

옛날 버지들은 폐쇄적인 가부장제도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 해도, 지금은 더 많이 보고 배운 글로벌 시대인데도 왜 이렇게 남녀가 부부가 힘들게 살까.

남자 여자가 각자 자신의 일을 하면서  집안일을 함께 하는 일이 왜 그리 어려울까.

돈이 드는 일도 아닌데.    

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것이 상품 유통구조  속에 있다.

모든 것을 이익관계로 판단한다. 돈이 되지 않는 일들은 다 쓸데없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가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가치, 이익, 성공의 잣대는 돈으로만 평가받기에 집안일은 아무 가치 없어 보인다.

주부의 일이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암만 떠들어도 허사일 뿐입니다.

돈의 가치만이 가치 있어 가사와 육아는 실제 손에 쥐어지는 수입이 없으므로 전업주부는 ‘집에서 논다’고 치부한다.

그러나 인간은 상품이 아닌 존재로 태어났다.

왜 우리가 매춘을 비난할까. 상품으로 만들지 않은 것을 거래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애초에 이런 자본주의 바깥. 전혀 다른 시스템 속에 있었다.     

우리 현실이 힘든 것은 우리 의식은 자본주의 사회에 길들여져 있으면서 나 자신은 상품 아닌 것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모순 때문이다. 서로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 달라 외치면서 상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은 돈”이라는 논리를 무의식으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돈으로 평가하고 나는 인간으로 대접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네가 아닌 내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져도 인간에게 공기가 있어야 호흡하듯, 인간이 기계가 되지 않는 한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특히 가족은 이익관계가 아닌 오로지 사랑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사랑이라는 보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우린 알고 있지만 안보이기에 잊어버린다. 그러나 잊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기처럼 오염될지라도 사랑은 거기에 있다.


(아이 그림)

엄마의 자리를 자본주의 체계로 이해하면 절대 안 되는 이유이다.

엄마의 자리는 아무런 수익성이 없는 헛된 것. 헛되기에 가장 위대한 자리이다.    

언젠가부터 보란 듯이 ‘육아전쟁’이란 말까지 출현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 전투가 되었다니

전쟁 통에 어느 부부가 아이를 낳고 싶어 할까. 딩크족들이 늘어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잃어버린 사회가 얼마나 야만적인지 우린 매일 손바닥 뉴스로 체득하고 있다.

뉴스 보기가 끔찍해 아예 안 보려고 한다.

법륜스님의 말씀 중에 현재 우리의 육아정책은 아이가 아닌 엄마를 위한 정책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육아지원금은 엄마에게 주지 않고 어린이집에 지원하면서 엄마와 있을 수 있는 아이도 어린이집에 보내진다. 정부가 아이에게서 엄마를 뺏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투표권이 없으므로 엄마를 위한 정책이 아이에게 결핍을 만들고 있다. 아이를 위한 우리 사회의 고민은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궂은일도 기쁜 일도 가족은 함께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http://www.anthonybrownebooks.com

( 앤서니 브라운 사이트에서 작가의 다른 모든 책을 볼 수 있다)  


- After  Reading -


- 자신의 일 스스로 하기.

- 방 정리 하기.

- 설거지. 화분에 물 주기. 빨래 개기. 재활용 쓰레기 버리기 등 집안일 돕기.


 어려서부터  자신의 일을 스스로 했던 큰 딸 션이. ( 4세 때 )



              



이전 07화 Owe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