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나폴리라 부르는 통영을 처음 방문 한 건 오래전의 일이다. 시내를 벗어난 외곽에 요트가 정박해 있는 리조트 앞에서 우리가족은 하늘빛을 담은 바다를 마음껏 보고 돌아왔는데 다시 그곳을 찾은 것은 관광도시로서의 면모를 좀 더 갖추었을 때였다. 통영은 볼거리가 많고 먹을거리가 풍부하여 먼 거리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바다 풍경과 석양이 아름다운 달아 공원과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와 수국이 활짝 핀 이순신공원 그리고 통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미륵산 케이블카와 벽화가 그려진 동피랑 마을, 강구안에 있는 중앙시장이 유명하였다.
내가 건강을 처음 잃었을 때 주윗사람 들은 모임을 한다거나 직장을 다니는 등 바쁜 생활을 하였다. 나는 호르몬을 조절하는 약으로 인하여 무력감에 빠졌는데 산과 들을 붉게 물들이는 봄에 철쭉이 활짝 필 때면 배가 고픈 아이처럼 통영을 찾았다.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겨 도착한 항구도시인 통영의 강구안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줄을 지어 정박한 배들과 쪽빛 바다를 바람결에 실어온 바다내음을 맡으며 바라볼 때면 나는 허기진 마음이 조금은 채워지는 것 같았는데그곳에서 가장 크다는 중앙시장에서는 지역 명물인 꿀빵을 파는 가게와 충무김밥을 파는 음식점들이 즐비하였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금방 바다에서 건져 올린 듯한 싱싱한 생선과 해산물 등좌판을 펼친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가족들이 집을 나가고 나서 출발을 하여 시장을 둘러보고 나면 보통점심때가 되어 나는 다른 데 가기에 앞서 배를 채우기 위하여 식당을 찾았다. 바다를 낀 음식점은 해물탕이나 생선조림 등 주로 바다에서 채집한 것으로 음식을 하였는데 그 옛날 고기잡이하는 어부들이 허기를 때우기 위하여 먹었다는 무우로 만든 섞박지와 어묵무침이 반찬인 충무김밥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한 후에 육지와섬을 이은 다리를 지나 미륵산을 향하여 나는 차를 몰았다.
미륵산에는 영면하신 박경리 선생님의 묘소가 있었다. 선생님이 손수 옷을 지어 입으실 때 사용하시던 재봉틀과 국어사전, 소목장이 나란히 전시된 기념관을 산소에 가기 전에 먼저 둘러보았는데 "걸레같이 변한 사전은 나의 글이요 문학이고, 해방 후 구입한 이 재봉틀은 나의 생활이며 이장은 내 삶의 근본이며 예술이니 영원히 간직하겠다." 하시며 남기신 유품 중 하나인 너덜 해진 국어사전을 보니 책을 쓰기 위하여 얼마나 보셨으면 저렇게 많이 닳았을까 싶었다. 기념관을 보고 나서 가파른 계단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미륵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선생님 묘소가 눈에 들어왔다. 원주의 토지문화관에서 문학의 밤 같은 행사를 할 때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선생님을 나는 아쉬움이 가득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는데 세상을 떠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선생님의 바람처럼 돌아가시고서야 고향땅에 묻힌 선생님의 묘소를 눈앞에서 맞으니 감개가 무량한마음으로 목례를 올리며 선생님의 명복을 빌었다.
하동을 여행하였을 때 우리 가족은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댁을 방문했었다. 외출을 삼가며 이십육 년 동안 총 20권의 토지를 집필하셨을 때 병을 앓는 선생님께 팔을 무리하지 말라고 의사가 당부를 하였지만 열정을 꺾지 않아 마침내 토지를 완성하였는데 최서희를 중심으로 한말의 몰락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토지의 배경이 된 기와를 얹은 여러 채의 한옥은 옛 정취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몇 년 전 가족과 함께 강원도로 여행을 떠나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원주에 있는 토지 문화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신 선생님이 고추밭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한데 가난한 문우들을 위하여 지었다는 별관은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절이 그러하듯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 같은 역사의 질곡을 오롯이 겪으시며 개인적으로는 일찍 남편을 여의고 의사의 오진으로 어린 자식마저 잃는 슬픔을 겪으셨다. 을사오적에 빗대어 쓴 풍자 시 '오적'으로 유명한 김지하 시인은 선생님댁에 은신한 것을 도와준 인연으로 김영주 토지문화원장님과 결혼을 하여 김시인이 옥고를 치를 때 "해 질 녘 형무소 높은 돌담 아래 한 여인네가 아기를 둘러업고 서성이고 있었다. 김지하 선생이 오늘 석방된다는 소식에 취재를 위해 차 안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굴까 저 여인네는.. 생각하다 박경리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신문기자가 쓴 것처럼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 여염집 아낙의 행색으로 험난한 딸 인생의 아픔까지 안으며 사위를 기다렸는데 통영을 떠난 후에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한 이후로 돌아가실 때까지 선생님은 따님인 김영주 토지 문화원장과 강원도 원주에서 함께 지내셨다.
선생님이 말년에 쓰신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돌아가시고 난 후에 세상에 나와 유고시집이 되었다. 어머니 품속을 파고드는 아이처럼 해마다 통영을 다녀오면 푸근한 밥상을 받은 듯 한동안 살아갈 에너지를 얻곤 하였는데 토지 외 김약국의 딸들, 불신시대, 성녀와 마녀 등 다수의 작품을 남기신 선생님에게 문학이란 어쩌면 생명과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하였다. 장례식 조사를 쓰면서 박완서 작가는 나이차도 거의 없는 생전의 선생님을 어머니와 같이 여겼다 하였는데 올곧은 성품을 흠모하는 나에게도 선생님은 어머니와 다름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생이 있다면 촌부의 아낙으로 살고 싶으시다는 선생님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남편을 만나 지금쯤 행복한 꿈을 꾸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는 날씨 좋은 날에 꽃 한 송이 사들고 나는 선생님을 뵈려 다시 통영을 찾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