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덜어냈다는 의미일까. 권력이 생길수록 스스로 우상이 되려 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멀미를 느꼈다.
동네 아주머니 몇은 몸이 아플 때면 우리 집을 찾아왔다. 마치 신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엄마는 밥과 반찬을 섞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주문이라도 외우듯이 몇 마디 중얼거렸는데 윷놀이 하 듯 칼을 던지고 나면 끝이 나는 연극 같은 퍼포먼스 후에 아주머니들은 쌀 같은 걸 들고 집엘 왔다. 나는 미신 같은 그것이 효험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고 사람이 낫고 기운을 차리게 되는 엄마의 신공 같은 기술로 엄마가 마치 신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재단이 미션스쿨인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정원수나 학교 지붕을 고치는 집사 아저씨는 내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기도를 하셨다. 그분의 전도로 주일이면 나는 교회에 나갔는데 여섯 달을 빠짐없이 다녔지만 생활비와 학비를 벌어야 하는 나는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신다는 어릴 적 옆 동네 창문에 그려진 양치는 하나님은 멀게만 느껴지는 존재였다. 쉴 시간도 없이 바쁜 생활로 나는 곧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다시 내가 하나님을 만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병원 복도를 걸으며 일층으로 내려와 한 손에 거치대를 밀며 걷고 있는 나는 한 남자의 사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사진 옆에는 4절지 크기의 흰 종이 위에 그의 일대기가 빼곡히 적혀 있었는데 개구쟁이 같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눈가 가득 주름을 잡고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국에 왔을 때 고속도로 휴게소 냉장고에서 갓 꺼내어 들이킨 시원한 맥주 한 캔이 너무 행복했다는 그는 휴가를 얻어 귀국해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병에 걸린 걸 알게 되었고 치료 중에도 수도원에 있는 고아들과 함께 했던 그분은 아프리카에 있는 톤즈의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선종하셨다 하였다.
퇴원하여 자료를 찾고 유튜브로 영상을 보며 알게 된 그분의 발자취는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병을 진단받을 당시에 하나님과 부처님 그리고 알라신에게 나를 낫게 해달라고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지상에서도 할 일이 많은 이분을 이렇게 빨리 데려가실 수 없다며 한동안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생각하였다.
아홉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대학을 다니며 장학금을 못 받은 것을 두고 어머니께 많이 죄송하다 하였다. 의대를 졸업하자 가정을 가지게 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돌볼 여력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여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다시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배웠다는데 어렵게 뒷바라지를 하여 의대를 나온 자식을 두고 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자식 앞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다. 살레지오 수도회에 입회하여 신부가 된 그의 이름은 이태석. 선배 신부님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한 그는 귀국한 후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하며 다시 선교지로 떠났는데 아프리카에서도 극빈한 남수단 톤즈에는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고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튜브에는 미국에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하여 신부님이 강연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얼굴에 흉터가 크게 나있는 삐쩍 마른 소녀가 나오는 사진이 있었다. 신부님은 전쟁의 외상으로 딱딱하게 굳은 아이의 얼굴이 펴지는 과정을 설명하였는데 오랜 내전으로 같은 민족을 죽이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총을 든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지어 글과 악기를 가르쳤고 깨끗한 우물물이 없어 병에 쉽게 걸리기 쉬운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과 함께 우물을 팠다. 병원에 가려면 먼 거리를 걸어야 하는 아픈 사람들을 위하여 직접 마을에 병원을 지어 진료하였는데 발이 짓물러 고름이 나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운전을 해서 마을을 찾아다니며 직접 손으로 고름을 짰다.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도 그분의 고귀한 희생은 마음을 차지하여 나는 한동안 자기 전에 그분의 편안한 안식을 매일 빌었다.
정해진 신앙이 없어 진달래가 피는 봄이면 남편을 따라 절에 가서 가족의 이름을 올리고 연등을 달았던 나는 좋아하는 작가님이 직접 취재하고 인터뷰하여 책을 출판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서 읽었다.
저자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임연심 선교사님을 직접 찾아가 생전에 만나고 대담하였는데 그분의 사후에 자료와 사진을 모아 "삶이 말하게 하라 "라는 책을 출간하셨다. 그분이 선교하신 곳은 나이로비에서도 자동차로 스물세 시간을 가야 하고 정부에서도 출입을 통제하며 푸코족과의 다툼으로 지역 전체가 전장이나 다름없는 아프리카 북부 투르카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우물마저 수 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 황폐한 불모지였다. 먹을 것이 없어 마약 성분을 씹은 아이들은 대낮부터 눈이 풀렸는데 부모가 병으로 죽어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하여 선교사님은 독사와 독거미 그리고 전갈이 기어 다니는 집에 거처하며 학교를 지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선교지에서 마음에 든 동역자가 있었지만 그는 다른 이와 결혼하게 되어 미혼으로 지내면서 그곳에서 풍토병으로 생을 마감하실 때까지 고아들의 맘으로 평생을 헌신하였다.
두 분이 뿌린 씨앗으로 아이들은 자라서 의사, 교사, 회계사, 은행원, 공무원 등 사회 각계에 진출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신앙을 가진다는 건 할 일 없는 나약한 인간들의 일이라고 치부했던 나는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준 그분들의 모습에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우연히 유튜브로 알게 된 목사님은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라하며 신랄하게 설교하였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손을 잡아주고 음성을 들려주신 그분은 나의 후원자처럼 든든한데 한 번도 먼저 믿어라고 말한 적 없는 친구는 얼마 전에 고급 하드커버로 된 성경책을 내게 선물하였는데 이제는 펼쳐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에서 우연히 스친 짧은 만남으로 목자를 만난 나는 거울을 비추 듯 가끔 신부님의 사진을 꺼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