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어나는 용기, 산수유에게 배우다
가을의 길을 걷다 보면, 낙엽 사이로 반짝이는 작은 열매들이 눈에 들어온다.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는 빨간 구슬들.
그 존재만으로도 쓸쓸한 계절 속에 따스한 불빛 하나가 켜지는 듯하다.
며칠 전, 동네 산책길에서 만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잎의 결이 아그배 나무와 비슷해 처음엔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잎맥과 열매를 살펴보니 야광나무였다.
봄에 피었던 하얀 꽃이 지고, 그 자리마다 붉은 열매가 맺혀 있었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 모습이 꼭 누군가의 오래된 마음처럼 따뜻했다.
야광나무는 장미과의 식물로, 봄의 흰 꽃과 가을의 붉은 열매를 함께 기억한다.
한 계절이 지나야 또 다른 계절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그 작은 열매가 말없이 알려주는 듯했다.
조급함 없이 제 시간을 살아가는 식물의 리듬은 늘 나를 멈추게 한다.
꽃이 피고 지는 시간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그 옆길에서 만난 산수유는 또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봄에는 가장 먼저 노란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가장 늦게까지 붉은 열매를 달고 선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을 모두 품고 있는 나무.
그 묵묵함 속에서 나는 매번 인내와 순환의 아름다움을 배운다.
박노해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모든 꽃망울들이 웅크릴 때
가장 먼저 피우는 산수유 꽃
모든 열매들이 떨어질 때
맨 나중까지 붉게 달린 산수유 열매
한 해의 시작과 끝이
가장 긴 산수유”
산수유는 그렇게,
한 해의 첫 문을 열고 마지막 문을 닫는 나무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시작과 끝’을 함께 품는 존재.
나태주 시인의 시도 이 계절에 어울린다.
“아프지만 다시 봄
그래도 시작하는 거야
다시 먼 길 떠나보는 거야
어떤 경우에도 나는
네 편이란다.”
이 짧은 시는 산수유를 닮았다.
겨울 끝에서도 다시 꽃을 피워내는 용기,
쓰러져도 또 한 번 일어나는 생의 의지.
그것이 바로 산수유의 삶이고,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도 나는 걷는다.
야광나무의 붉은 열매가 반짝이는 길을 따라,
산수유의 구슬 같은 열매가 매달린 담장 옆을 지나며.
식물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계절의 의미를 배우고,
삶의 속도를 다시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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