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에 이어 B737-400 기종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자면 팩스 브리핑(Pax briefing) 시연에대해 말해볼까 합니다.
여기서 팩스 브리핑이란 항공기가 이륙하기 전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승객들에게 비상 탈출에 대비한 안내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비상구의 개수, 위치, 탈출 경로와 더불어 안전벨트의 착용법, 구명조끼의 위치와 사용법 등을 이해하기 쉽게 알리는 것이지요. 보통의 항공기는 모니터를 통해 영상으로 보여줍니다만 개인 모니터나 스크린 모니터가 없는 기종에서는 승무원이 직접 시연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항공기 기종을 떠나 모니터 시스템이 고장 나는 경우에도 승무원이 팩스 브리핑을 시연하게 됩니다. 간혹 생기는 일로 그걸 대비해 모든 항공기에는 팩스 브리핑에 쓰이는 장비 세트가 실려있습니다. 구성품은 안전벨트, 산소마스크, 구명조끼, 브리핑 카드입니다.
"구명복은 머리 위에서부터 입으시고 끈을 허리에 감아 조여주십시오. 앞에 있는 손잡이를 당기시면 부풀어지며, 부풀지 않을 때는 고무관을 불어주십시오."
방송 담당자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팩스 브리핑 시연을 하는 승무원들은 일제히 움직입니다. 모든 동작은 정해져 있고, 입사 후 교육을 받는 기간에 숙지하고 테스트까지 치렀거든요. 구명조끼를 머리부터 쓰고, 줄을 감고, 탭을 당기고, 뒤이어 구명조끼의 어깨 부근에붙은 고무관을 잡고 부는 시늉을 합니다.
'후- 후-'
분홍빛 입술을 모아 우아하게 입바람을 내부는 모습. 한 번쯤은 보셨으리라 짐작됩니다만 요즘은 예전만큼은 보기 힘든 광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국내선 전담 승무원으로 4년간 전국 공항을 돌면서 과연 몇 번의 팩스 브리핑을 했을는지.
물론 처음은 어려웠습니다. 관심이 없는 승객들도 있지만 브리핑 장비를 들고 복도에 서면 아무래도 이목이 집중되거든요. 가끔은 무대에 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방송에 맞춰 틀리지 않고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요.
익살스런 브리핑 시연
'철컥철컥'
안전벨트 탈착을 명쾌한 소리와 함께 끝냈습니다. 이제 산소마스크 구간만 잘 넘어가면, 구명조끼의 고무관을 우아하게 후후- 불고난 후 안전 점검을 하며 그대로 카리스마 있게 퇴장하면 됩니다.
"기내에 산소 공급이 필요할 때는 선반 속에 있는 산소마스크가 내려옵니다. 마스크는 앞으로 잡아당겨 호흡을 몇 번 하고 머리에 맞게 조여주십시오."
산소마스크를 앞으로 잡아당기고 입가에 가져가서 호흡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무줄을 당겨 머리에 쓰는데 아뿔싸... 고무줄의 탄성이 이렇게나 좋았나요? 동그랗게 쪽진 머리에 짱짱한 고무줄이 걸리더니 '딱!' 소리와 함께 볼에 산소마스크가 달라붙습니다. 노오란 산소마스크가 마치 혹처럼 붙었네요. 부끄러움은 그저 제 몫입니다. 빨개지는 볼은 볼터치를 과하게 한 거라 칠게요. 다시 얼른 고무줄을 늘여 산소마스크를 목 아래로 끌러 내립니다. 다음 동작인 고무관 '후- 후-'를 우아하게 하려면 혹부리 영감은 아니 되잖아요. 실수를 교훈 삼아 그 뒤로는 시연 장비를 준비하면서 마스크 고무줄부터 체크했습니다.
B737-300, 400과 함께 하던 그때는 방송이 나오면 몸이 자동으로 착착 움직일 정도였는데, 세월이 흘러 국제선으로전환이 되고 주로 대형기를 타게 되면서 팩스 브리핑 시연을 할 일이 점차 줄었습니다. 종종 국내선 비행이 나오더라도 주력 기종이 B767이나 A321로 바뀌어 시연할 일 없어졌지요.
지겹도록 시연을 하던 시절엔모니터가 있는 항공기를 만나면 팩스 브리핑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에 쾌재를 부르며반가워했었는데, 점차 안 하게 되니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더라고요.
퇴사를 하고 가족들과 여행을 가거나 비행기 탈 일이 생기면 해당 비행기를 유심히 살핍니다. 어쩌다 모니터가 없는 항공기를 만나면 괜스레 신나기까지 하더군요. 팩스 브리핑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두근두근 합니다. 일하는 승무원들은 그 듀티가 싫을 수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아줌마는 혹여 실수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온마음으로 응원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