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승무원 일문롱답 세 번째. 영어
B-I-N-G-O, B-I-N-G-O
어렸을 때 노래로 배우는 영어를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린 시절의 난 영어를 정말 즐겁게 익혔다. 지금이나 그때나 어린이 영어 전문가이신 엄마 덕분이었다. 그 시절 영문학을 전공한 젊은 엄마에게 큰 딸인 나는 최고의 실습 상대였을 것이다. 주변 친구들처럼 학습지를 풀거나 학원에 가는 대신 여러 가지 놀이나 연극, 영어 비디오를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힐 수 있었다. EBS에서 방영하는 특활 영어를 녹화해서 보고 또 보고, 디즈니 만화를 자막을 가리고 보는 게 나의 하루치 영어공부였다. 요즘의 세련된 교재들과 비싼 프로그램에 비하면 참으로 소박하지만 지금까지도 난 그게 꽤 괜찮은 영어학습 방법이라고 믿는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플래시카드를 뒤집어 가며 여러 가지 게임을 하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놀이었고 공부였다. 한 번도 영어를 공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즐거운 놀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조기교육 열풍이 당연한 지금은 꼬마들이 영어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배우곤 하지만 87년생인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중1 때부터 정규 영어과정이 시작되었다. 영어라면 자신 있었던 나는 입학식 날부터 첫 영어시간을 기대했다. 영어로 자기소개까지 준비해 갔던 것 같다. 그렇게 기다리던 첫 영어시간. 출석을 부르신 선생님께서는 다들 영어 공책을 꺼내라고 하시더니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10분 안에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순서대로 영어 공책 줄에 맞게 써서 내세요”
준비해 온 영어 공책을 펴보니 낯선 네 개의 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옆 친구를 흘끔 보니 마치 음악 공책에 높은 음자리표를 정확히 그려내듯이 열심히 알파벳을 써넣는 중이었다. 앞에 앉은 친구도 고개를 푹 숙이고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영어 공책 줄 안에 맞춰서 알파벳을 쓰는 비밀을 나만 빼고 다 아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나도 알파벳을 알았다. 쓰고 읽을 줄도 알고 노래로 부를 줄도 알았다. 그런데 영어 공책에 써 본 적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쭉 써서 내면 되었을 것을,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안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그 시절의 나는 그냥 공책을 앞에 두고 가만히 망설이기만 했다. 책상 사이사이로 돌아다니시던 선생님께서 내 앞에 멈추시더니 다른 친구들에 들리면 안 되는 것처럼 속삭이듯이 물으셨다.
"자연이 알파벳 아직 모르니?"
내 인생 최악의 질문이었다.
알파벳을 모르냐고요? 저 단어도 엄청 많이 알고요, 영어로 디즈니 노래도 부를 줄 알아요.
마음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난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영어 공책에 써본 적은 없어서..."
선생님은 머리를 갸웃하더니 빈 A4용지를 주시며 여기에 한번 써보라고 하셨다. 그제야 난 알파벳을 단숨에 썼다. 고개를 끄덕하신 선생님께서는 교탁으로 향하시며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다음 시간 숙제는 1과의 다이얼로그를 공책에 세 번 써오는 거예요”
교과서로 배우는 영어는 지루하기만 했다. 그나마 교과서를 외우는 숙제는 좀 나았다. 고등학교에 가니 입학성적이 좋다며 얼떨결에 경시반에 배치가 되었다. 경시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름이 경시반인지도 의문이었고, 매일 남아서 별도의 특강을 들어야 했던 것도 스트레스였다. 이 경시반만의 특별한 교재가 있었으니 바로 성문 영문법이었다. 그때 억지로나마 꾸역꾸역 외웠던 단어와 이디엄이 어느 정도 기반이 되어주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이렇게 재미없게 공부를 하느니 차라리 비인기 종목인 아랍어나 러시아어를 배워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공부한 가닥이 있는지라 영어는 크게 시간 들여 공부하지 않아도 모의고사에서 보통은 2등급, 점심 먹고 깜빡 졸아서 시간 분배가 안된 날은 3등급, 모조리 찍은 문법 문제가 운 좋게 다 맞은 날은 1등급도 어쩌다 한번 나오곤 했다. 수능에서 외국어 3등급을 받아 들고 수시전형으로 별 고생 없이 서울 4년제 대학에 붙고 나니 이젠 이 지긋지긋한 시험과도 안녕이구나 하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전혀 안녕이 아니었다는 건 곧 깨닫게 되었지만.
10년 넘게 영어를 배웠는데
왜 말이 안 나오는 거지?
대학교에 입학하니 필수과목으로 영어가 있었다. 회화 위주의 쉬운 수업이라고 해서 부담 없이 들었는데 영어 좀 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존심은 첫날부터 박살이 났다. 캐나다 교포였던 교수님의 영어는 귀에 쏙쏙 들리는데 막상 말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마음먹고 오늘은 이런 질문을 해봐야지 연습까지 해도 막상 말을 하려면 자신이 없어서 입에서만 맴돌았다. 처음으로 화가 났다. 영어를 그렇게 오래 공부했는데 왜 나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걸까.
“엄마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캐나다 회화 선생님이 있는데 만나보지 않을래?”
나의 영어 스트레스를 눈치채셨던 엄마가 권하셨다. 딱히 설렘도 부담감도 없이 말 나온 다음 주부터 회화를 시작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것이 지금은 오랜 인연이 된 친구 멜라니이다.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한 날 멜라니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네 살 터울의 중학생 여동생은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는데 비해 언니인 나는 더듬더듬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 동생의 경우 영어가 뭔지도 잘 모를 때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부터 시작해서 해리포터 전 권을 오디오북으로 셀 수 없이 듣다가 입이 트인 케이스였다. 실제로 해외 경험, 사교육 한 번 없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해리포터만으로 영어를 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영어회화가 자유로워졌다. 당시의 나는 한창 입시 공부에 치여서 영어에만 따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실천에 옮겨야 할 때라는 걸 알았고, 그건 바로 지금이었다.
멜라니와 영어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교과서를 벗어난 영어를 시작했다. 별다른 것 없이 그냥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는 식이었다. 친구가 많은 멜라니는 파티도 자주 열었는데 그때마다 나를 꼭 초대해 주곤 했다. 영어로 말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자주 놓이다 보니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말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다음 수업에서는 한 마디라도 더 해보기 위해 동생이 보기 시작했던 미드 <프렌즈>를 함께 보기 시작했다. 미드에서 익힌 표현은 이야기를 지어내서라도 어떻게든 써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나의 영어는 다시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었다.
생애 처음,
자발적으로 문법을 공부하다
영어가 재미있어지니 처음으로 문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졌다. 마침 학교에서 모의토익을 본다길래 호기롭게 신청했다. 하지만 결과는 600점대 이하로 참담했다. 분석해보니 문제는 리딩과 그래머였다. 수능을 본 이후로 문법에는 손도 안 댄지라 다시 시작할 생각에 막막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가짐은 고3 때와 달랐다. 정말로 영어를 잘 하고 싶었다. 기초적인 문법을 공부하는 길이 그 첫걸음이라면 즐겁게 해 볼 생각이었다. 휴학까지 하면서 홀로 토익에 매달렸고 그 결과 4개월 만에 930점이 찍힌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토익의 경우 나는 문제집만 가지고 혼자 공부했다. 일단 고등학생 때 공부했던 문법책 중 그나마 가장 덜 끔찍했던 책 한 권을 골라 시간이 닿는 대로 읽었다. 당시에 중학생 영어 과외를 했는데 학생들에게 기초 문법을 반복해서 설명했던 것이 오히려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는 머릿속에 익숙한 동네의 지도가 그려지고 그 안에 동사무소와 슈퍼마켓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과자는 몇 번째 코너 선반 어디쯤에 있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속속들이 알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토익 문제집은 서점을 싹 쓸다시피 하여 출판사별로 다 풀었다. 처음 두 권은 가관이었다. 반타작이었다. 틀린 문제를 복습하며 새 문제집을 계속 풀었다. 토익서 7권, 얇은 모의고사집은 세네 권 정도 풀었던 것 같다. 정말이지 휴학기간 내내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토익 문제만 풀었다. 그랬더니 다섯 권 째부터는 세네 문제 빼고는 다 맞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리스닝은 중간 이상의 점수가 되자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게 미드 딕테이션이었다. 마침 재미를 붙였던 Friends에서 그동안 재밌게 봤던 것 중에 스무 번을 돌려봐도 안 질리겠다 싶은 에피소드를 세 개 골랐다. 하루에 두 시간 꾸준히 딕테이션을 한 결과 그다음 토익시험에서 리스닝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딕테이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난 브런치 글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나요?>
https://brunch.co.kr/@missconcierge/9
영어.
가깝고 먼 당신
어떤 언어든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리면 결국 점수를 따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언어는 궁극적으로는 나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하는 토익이라면 단순히 점수를 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발판이라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공부해보자. 물론 문법은 빠삭한데 말 한마디 못하는 것보다는, 허술한 문장일지라도 자꾸 내던지면서 배우는 게 낫긴 하다. 그렇지만 영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문법에 맞는 문장을 다양한 어휘를 사용하여 구사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시기가 온다. 나의 경우 해외생활을 6년 가까이하고 있지만 지금도 늘 새로운 표현을 배우고 써보며 까먹기도 하고, 다시 어디서 그 표현을 들으면 내 것이 되기도 하는 그런 경험을 매일 하는 중이다.
안녕하세요.
시애틀과 알래스카에도 가을이 찾아왔어요.
영어에 대한 글을 쓰려다 보니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제 영어는 익숙해졌다고 느끼다가도 매일매일 새로운 표현을 배우고, 조금 피곤한 어떤 날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며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생각하곤 해요. 저보다 영어를 잘하시는 분도 많고, 영어 교육 쪽으로 전문가이신 분들도 넘쳐나는 브런치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하는 것보단 그저 나의 이야기를 나눠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번 글을 써보았어요. 10년 넘게 영어를 배웠는데 왜 말을 못 하니! 하는 건 아마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우리 모두 힘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