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마음은 속으로만 남겨야 한다
하노이에 온 지 어느덧 3개월 차
회사와 집으로 가는 길은 차츰 익숙해졌지만
수민은 낯선 이곳에서
여전히 방향 감각을 찾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나 당당했던 모습은
이곳에서는 어디서도 속하지 못한 채
웅크려 들기만 했다.
많지는 않아도
늘 든든했던 한국의 친구들은
고작 몇 천 마일 떨어져 있다고
그만큼의 거리감이 조금 생긴 것 같았다.
미정이 소개해준 모임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나가지 않은지 오래다.
수민씨, 안녕하세요
일요일 점심 즈음
친구로 추가되어 있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수민이 근무하는 현지법인의 다른 팀 남자직원이었다.
사실 수민은 그 직원이 누군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소속을 설명하자
회사 조직도를 검색하며 그제야 경계심을 풀고
'무슨 일이 생긴 건가'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저 다름이 아니라
제 와이프가 외로워해서요
친구가 되어 주실 수 있나요?
낯가림이 있는 수민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사랑꾼 동료'의 부탁에
뭐라 답을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타지에서, 같은 한국인,
특히 같은 회사사람의 부탁을
무슨 이유를 들어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냥 거래처 만난다 생각하고 보자
그리고 그렇게
남녀 사이의 소개팅도 아닌
그의 와이프라는 사람을 약속된 장소에서 만났다.
남편을 따라 베트남에 와서
현재 전업 주부로 일하고 있는 민선은,
처음 만난 수민에게 회사사람들의 모든 비밀을 알려주었다.
3개월 동안 매일 처음 보는 것 같은 벽을 느끼던
회사동료들의 가족사와 에피소드를 들으니
왠지 그들에게 내적 친밀감이 커지는 것을 느꼈고
그런 '중요한 비밀(?)'을 알려준 민선 또한 고마웠다.
그리고 왠지 수민의 속내도
민선에게 한두 가지쯤은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우리 팀에선 맥주 한잔 마실 사람이 없어서
솔직히 외로워요
다들 술을 못 드신대요
수민의 이야기에 민선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경청하며
친구와 같은 위로를 건네자
수민도 어느덧 마음의 문을 풀고 그녀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은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점심을 먹거나
민선이 자기의 집에 수민을 초대하여
수다를 떨며 반나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2주 뒤-
회사 단체 골프야유회가 있었는데
골프를 치지 못하는 수민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열외가 되었고
야유회 다음 날 수민은 많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모두 달랐지만
내용은 모두 똑같았다.
수민씨,
우리 언제 맥주 한 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