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게 말해서
지사장님 입장에서는
수민 씨보다는 응옥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점심을 먹고 근처에서 커피 한잔을 하다
다른 부서의 A과장이 이런 말을 했다.
수민 씨는 어차피 떠날 사람이잖아.
응옥은 베트남 사람이라도 계속 같이 가야 하는 거고
최근 수민은 업무 중 굉장히 불쾌한 경험을 했다.
평소 수민을 먼저 챙겨주던 베트남 직원 미세스 응옥이
며칠 전부터 무엇이 화가 난 건지
수민에게 퉁명스럽게 말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사장에게, 수민으로 인해 수민과 함께 일하는 베트남 직원들이
무척 힘들어하며 수민이 맡고 있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수민을 더욱 당혹시킨 것은
지사장이 이 사실을 팩트체크 하는 것 없이
수민을 불러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걱정된다고
불편한 마음을 비춘 것이었다.
이직이 잦은 다른 베트남 직원들과 다르게
이미 입사한 지 7년이 넘은 미세스 응옥은
거의 지사장의 비서 혹은
동향보고에 특화된 내부스파이처럼 행동했고
이번 동향보고의 먹잇감으로
베트남 직원도 아니고 한국인인 수민이 걸려든 것이다.
아마 몇 주전 수민이,
업무태도에 대해
그녀에게 한 번 주의를 준 것이
감히 지사장의 비서인 그녀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지사장의 차량기사를 통해
지사장의 공적/사적 이동 루트와 방문한 장소를
몰래 기록해 오고 있는 사실을 수민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비서의 역할을 하며 얻은
한국 주재원들의 아주 사적인 정보들(이를테면 남녀관계와 같은-)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니며
베트남 직원들 사이에서 권력을 뽐낸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한국인인 자신에게까지 그 권력을 뽐내려
모함하는 상황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수민은 어이가 없고 기가 찼다.
수민은 미세스 응옥보다 직급이 한참 위였지만
응옥은 어쩐지 수민에게
자신이 수민보다 상위 계급임을 인식시키고자 하는 것 같았다.
지사장에게 응옥에 대해 다 까발리고 싶었지만
그가 알고 있음에도 묵인할 수 없을 만큼 그녀에게 빚졌거나
아니면 사람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거나 -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오해하는 상황까지 이른 시점에는
지사장에게 무슨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아
수민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마음까지도-)
언젠가 지사장님도 알게 되겠지
영원히 모른다 해도
그 또한 그의 업보로
결국 곁에 있는 좋은 사람을 많이 잃을 것이니
억울해할 필요 없다
미세스 응옥이 이렇게 새로 전입한
신규 여성 주재원을 자신의 발아래임을 인식시키고자
어찌 보면 귀엽기까지 한 정치 싸움을 벌인 배경에는
주재원의 新계급도를 너무나도 빠르게 간파했기 때문이다.
최근 경기침체로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듯
수민의 회사에서도 가족이 없는 미혼직원들을
주재원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단신 주재원의 경우,
국제학교 및 생활비를 더 많이 지원해줘야 하는
가족을 동반한 주재원보다 훨씬 비용 절감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단신주재원들은 홀몸이라
국가 간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에
주재기간 및 발령도 융통성 있게 운영될 수 있다.
수민도 미혼 여성인 자신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운 좋게(?) 주재원 티켓을 얻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단신주재원의 수가 갑자기 늘어남에 반해
현지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아 갈등의 요소가 싹텄다.
여태까지는 주재원은 장기 주재원으로
못해도 5년 이상, 혹은 10년 넘게
함께 동고동락을 하며 각 집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로
'가족'처럼 지내왔는데
언제 다시 복귀할지도 모르는 단신주재원들의 발령은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손님' 정도로만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쩌면 가장 가까워야 할 한국인 직원이
'조금 미워도 함께 해야 할' 베트남 직원보다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수민은 거듭 생각했다.
자신이 내년에, 내후년에
혹은 5년 후에 어떤 국가에서 어떤 직위로
일을 할지는 모르지만
업무적으로 가장 편하고 가까운 상대를 끝없이 경계해야만
내가 이끄는 조직이 더욱 건강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한편, 수민은 단신 주재원인 본인보다
더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계급이 있음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