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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이로운 Apr 02. 2020

할아버지와 마스크


아침 8시.

한참 꿀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이 시간에 대체 누굴까 생각하며 휴대폰을 보니 아뿔싸...! 할아버지다. 난 괜히 헛기침을 하고 목소리가 잘 나오는지 확인한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네! 할아버지"

 "오냐~ 자고 있었냐?"

 "아니에요. 할아버지. 저 일어났어요"

난 한참 전에 잠에서 깬 것처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옛날 분이신데다 엄하기까지 하셔서 늦잠 자는 걸 절대 용납못하신다. 그 전에도 잠을 자던 중에 전화를 받았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 전화를 받을 때면 난 자더라도 안 잔 척, 부지런한 척, 아침형 인간인 척 꼭 연기를 한다.

 "너 사는 서울 주소 좀 문자로 찍어봐. 마스크 보내줄게."

 "마스크요?"
 "응 마스크 없다면서~ 할아버지 집에 많으니까 보내줄게"

 며칠 전, 할머니와 통화하면서 마스크 구하기가 힘들다고 지나가면서 말했는데 그걸 할아버지께 전하셨나보다.

 "전 괜찮은데... 할아버지 쓰시지"

 "할아버지는 아직 많으니께 걱정 말고 잘 써~ 밥 잘 챙겨 먹고"

 난 순간 귀를 의심했다. 밥 잘 챙겨먹으라고..?




어릴 때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려보면 즐거웠다거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하는 기억은 딱히 없다. 나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매우 엄하고 무서운 분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언니와 함께 잠깐 할아버지댁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예절에 어긋난 행동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불같이 화를 내셨다. 큰소리를 내어서도 안되고, 말썽을 부려선 더더욱 안되니 당시 나는 언니랑 놀 때도 조용히 놀았고, 말다툼을 할 때 역시 방 안에 들어가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소곤대며 싸웠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한 번은 실수로 할아버지 돋보기 안경을 부러뜨린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꾸중을 들을까봐 상자 안에 깊숙이 숨겨놨다 그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덕에 안그래도 혼날 것을 더 크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어디 이뿐이랴. 할아버지에 대한 에피소드는 밤을 새도 할 말이 많은데 학창시절에는 방학 때 노랗게 염색을 했다가 네가 미국놈이냐며 호되게 야단을 맞았고, 밑위가 짧은 바지를 입고 갔다가 아예 팬티를 드러내고 다니라는 소리를 들었고, 심지어 왜 양말을 안 신고 다니냐고 꾸중을 들은 적도 있다.


이렇게 나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망태 할아버지보다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기에 난 밥 잘 챙겨 먹으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굉장히 어색하게 들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런 말씀도 하실 줄 아는 분이구나' 생각하며 내가 몰랐던 할아버지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잊고 있던 사이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마스크가 도착했다. 빈 과자상자에 빼곡하게 담긴 마스크를 보니 그래도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보다는 자상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 대한 무서웠던 기억들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항상 엄하시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가 되면 할아버지는 '내가 바로 산타할아버지야 허허' 하며 재미없는 농담을 건네기도 하고, 언젠가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진달래 구경을 가자며 오토바이를 태워주신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잠깐 할아버지댁에서 지냈을 때에는 비가 오는 날, 손수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러 오시기도 했었다. 갑자기 찾아온 아토피로 내가 고생할 때에는 연고도 사다주시고 직접 발라주시기까지 하셨었다. 최근에는 내가 오랜만에 찾아뵀더니 양미리(생선)를 구워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가 구워주신 양미리와 함께한 밥상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충분히 자상하시고 따뜻한 면도 많았다. 근데 난 왜 그토록 할아버지를 멀리하고 무서워했을까? 내가 할아버지께 조그만 더 살갑게 굴었다면 할아버지도 나를 좀 덜 혼내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난 서른이 넘은 나이에 우리 할아버지가 무섭기만 한 분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게 다 마스크 덕분이다. 아니 코로나 덕분인가?? 암튼 둘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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