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걸 소진했던 2번째 직장을 퇴사하고 떠난 퇴사 여행기
마지막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새벽 3시였다. 그때부터 짐을 챙겨 공항버스 첫차를 탔다.
이렇게도 또 급작스럽게 여행이 시작되었다. 12월 내내 마지막으로 남은 프로젝트를 정리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거의 간헐적 수면 수준이었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나날에 뻑뻑해진 눈을 부릅뜨고 여행 일정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부랴부랴 서치를 했다. 새벽에 예약한 첫째 날 숙소를 제외하곤 6박 7일의 모든 일정이 미정인 상태였다.
10년 전 일본 어학연수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갔던 홋카이도 여행 이후로 이렇게 무계획으로 여행을 가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즐겁게 지내는 12월 내내 나는 이날만을 생각하며 텅 빈 사무실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짜내고 있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있음에도 이날이 왔다는 것이, 여행을 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행기에 탑승하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나보다 먼저 퇴사한 동료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다 비우고 힐링하고 오라고, 그간 너무 고생 많았다고 원래 나의 밝은 모습을 되찾길 바란다고…
그간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던 걸까 그 회사에서 내가 보여줬던 밝은 모습이 있긴 있었던 걸까?...
피곤하고 지쳐서 스트레스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이게 원래 내 모습인데 이제야 들킨 건지는 모르겠다. 간헐적 수면이 그리고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계속된 피로로 인해 몸에 염증이 생기고 어깨와 뒷골은 항상 당기고 인간 핫팩처럼 계속 미열이 있는 상태.
정말 올해처럼 한 해의 끝이 오길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다.
올해의 끝이 오기 전에, 이 회사에서 끝을 내가 먼저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나보다 먼저 퇴사한 동료들은 왜 이렇게 사람이 요령이 없냐고, 왜 개고생을 사서 하고 있냐고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이야기했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고 모든 게 공중에 붕 뜬 상태였다.
나는 나답게 마무리를 짓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쏟아부었고, 아주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은 겪지 않고 나 또한 괴물이 되지 않고 나답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회사 일은 간신히 마무리가 지어졌지만 나는 반대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숨도 못 쉴 만큼 무언가 가득 차 있는 상태. 내 마음과 머릿속이 비명만을 질러대고 있는 상태. 그런 과열, 과적의 상태였다. 공백이 필요했다...
그때 떠오른 게 홋카이도였다. 한번 가봐서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곳.
1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면 내 시끄러운 머릿속과 마음속과는 달리 여백, 순백으로 가득한 곳.
비교적 시간의 여유가 있는 퇴사 여행인데 앞으로도 쉽게 갈 수 있고 이미 한번 가본 홋카이도로 여행지를 정한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내 마음과 머릿속이 새로운 걸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북적북적 시끄러운 상태였다.
홋카이도가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그간의 후보지는 일순 정리가 됐다.
아쉽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여행지는 이곳이고, 나에겐 이 시간이 꼭 필요했다.
이제 드디어 일 때문에 맨 끝으로 미루고 미뤄둔 올해의 ‘나’를 정리할 시간이었다.
아직 비어있는 일정은 다 채우지 못했지만 더는 눈을 뜨고 있을 기운이 없어 눈을 감았다. 웃긴 게 이렇게 휴식이 필요한 와중에도 여유로운 일정으로 다닐 생각은 없는 나였다.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휴대폰을 다시 켜자마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메시지들..
이미 나는 퇴사를 했는데 아직도 오는 업무 요청과, 내가 마지막까지 애를 쓰고 나왔지만 또 터진, 더 이상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 안타까운 소식들…
몸은 삿포로에 도착했지만, 나의 정신은 여전히 회사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잘못이 아닌 일이지만 부채 의식이 여전히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이 부채 의식이 마지막까지 내 모든 걸 쏟아붓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론 나는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었다.
메신저에서 로그아웃한 후 삿포로역까지 가는 열차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머릿속에서는 마치 라디오라도 틀어놓은 것 마냥 끊임없이 상념이 이어졌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러가며 삿포로역에 내렸다. 그제야 나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곳에서 되게 벗어나고 싶었구나.
그냥 다 내던져버리고 싶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