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카나이는 홋카이도 최북단에 위치한 도시로 일정에 포함하는 순간 삿포로 기준 왕복 이동 시간만 10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이후 일정들을 고려하면 여행 동선도 비효율적이다. 또한 왓카나이는 관광지로 잘 알려진 곳도 아니었고 냉정하게 말해서 시간을 들여 찾아갈 만큼 매력적인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고 싶었던 이유는 학창 시절 꽤나 좋아했던 허니와 클로버라는 만화책에 왓카나이가 나왔었고 그때 느낌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끝, 적막, 공허, 자유…
근본적으로 그런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 곳에 끌린다. 왜 그럴까 생각해도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왓카나이와 경합을 펼쳤던 여행지는 도야호수와 시레토코 반도였다. 특히 도야호는 휴양하기 좋은 한적한 곳이면서도 하코다테로 이동하기도 좋은 동선에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었다.
일정상, 비용상, 그리고 이미 여행 오기 전부터 지칠 대로 지쳐있는 나의 컨디션 상 왓카나이를 가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왓카나이에 계속 미련이 남았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결정했다. 가자! 왓카나이.
아무것도 없어도 좋고 사실 그 삭막함과 공허함 벗어남 그리고 끝이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가는 거니까.
그렇게 왓카나이에 간다! 확정되니 교통체증이 드르륵 풀리듯 이후의 모든 일정이 다 정리되었다. 삿포로, 하코다테 숙박도 APP으로 바로 예약 완료! 10년 전에 JR 시각표 책 사서 열차시간 알아보면서 다녔던 걸 생각해보면 참 세상이 편해진 게 맞긴 한 것 같다.
10년 전 오타루 의 풍경
10년 전 오타루에 왔을 때는 늦은 오후였고 신년 연휴 기간이라 거의 모든 상점이 닫혀있었다. 그래서 사실 운하 관광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폐쇄된 도시 같은 오타루에서 나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창 밖에서 가게 안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창밖에서 바라본 가게 안의 상품들이 정말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오르골부터 유리 수공예품, 각종 소품들…. 사고 싶은 게 한 두 개가 아니어서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난다.
제대로 관광하지 못했음에도 다음에 이곳에 온다면 꼭 여기서 하루 숙박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동네 자체가 풍기는 정서가 좋아서였다. 서양식 건축물들이 있어 유럽 같은 느낌이 나면서도 골목골목은 또 아기자기한 일본 정서가 있어 소박하고 정겨운 느낌의 도시였다. 그리고 정말 어디 한 군데 빈틈없이 눈이 쌓여 있었다.
10년 전 내 기억 속의 오타루와 지금의 오타루는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마치 같은 스케치의 그림에 다른 색을 칠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단 사람이 엄청 많아졌다. 10년 전에는 좀 더 한적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작은 도시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한적했던 오르골당도 지금은 거의 기념품 판매소가 된 느낌이고 유명 베이커리 체인들이 생겨 동네 특유의 정취가 사라지고 정신 없어진 느낌이다.
오타루의 특산품인 오르골과 유리공예 제품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썩 그렇게 갖고 싶진 않았다. 이곳이 10년 동안 변한 것처럼 그간 나도 좀 변한 것 같다.
여기서 1박을 할까도 생각했었는데 안 하길 잘한 것 같다. 너무 분주해져서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었던 기억 속의 오타루의 모습이아니었다.
좀 쉴 겸 계획을 정리할 겸해서 오르골당에서 파이프 오르간 옆 벤치에 앉았다.
옆 벤치에 앉은 가족이 싸운다. 싸운다기보다 일방적으로 아이가 짜증을 내고 있었다.
저 나이 때의 변화무쌍한 감정 변화야 모를 일도 아니지만 참 여행 오는 게 쉬운 일 당연한 일이 아님을 자기 돈 벌어서 왔다면 저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에 짜증에 공감하기보다 이런 생각이 하는 나도 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구나… 아이도 없는데 부모 입장에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구나를 새삼 실감했다.
나는 저 아이처럼 기분이 안 좋다고 상태가 안 좋다고 넋 놓고 짜증내고 있을 순 없다.
내 마음에 안 들게 변한 오타루지만 내가 진짜 괴물이 될 위기를 참으며.. 나를 훼손할 위기를 겪으며 번 돈으로 온 여행이니까…
오르골 당을 벗어나니 그래도 사람들이 조금 줄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헬게이트가 시작되었다. 오타루 특산품인 유리 공예제품들과 각 상점만의 독특한 디자인의 소품들을 파는 상점가가 나오는데 팔고 있는 제품들이 너무 예뻤다. 유리공예나 오르골은 눈 딱 감고 넘어갔는데 부엉이 모양의 컵과 티포트에선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남은 여행 일정 내내 안 깨뜨리고 한국까지 무사히 가져갈 수 있을까 해서 안 사려고 했는데 어느새 내 손엔 부엉이 컵과 티포트 세트가 들려있었다...
그렇게 홀린 듯이 상점가를 구경하다 운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번개가 계속 치고 하늘에서 우박에 가까운 눈이 내렸다. 나를 공격이라도 하듯 맞으면 얼굴이 따가웠고 옷을 찢을 것처럼 거세게 내렸다.
도저히 밖을 돌아다닐 수 없는 상태라 오타루 비어 소코 넘버원에 들어와 맥주 한잔을 시키고 쉬기로 했다.
피곤한 상태에 맥주를 마셔서 그런지 잠이 솔솔 왔다. 예전에는 내가 아마 오후 늦게 왔고 신년 연휴 기간에 와서 오타루를 더 한적한 도시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거의 상점가가 50% 이상은 차지하고 있는 기분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진 찍고 하루 관광하기에는 나쁘지 않다.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꾸벅꾸벅 졸았다. 오전 6시에 일어났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야경까지는 보고 가려고 다시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지만 아까보다는 눈발이 잦아들었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오타루는 변함없는 눈의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