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여유와 평온을 주는 하얀 도화지 속으로. 비에이 패치워크에 가다!
10년 전 홋카이도를 여행할 때는 레일패스를 이용해 삿포로에서 시작 오타루, 하코다테 지역을 기차로 여행했었다. 레일패스가 적용되는 지역 위주로 동선을 짜고 일정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가보지 못한 곳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지난번에 가보지 못했던 비에이&후라노 지역을 가보기로 했다.
홋카이도는 지역 간 거리가 있는 편이라 자칫 동선을 잘못 짜면 이동 시간에만 반나절 이상이 소요돼 귀중한 시간을 날리고 만다. 특히나 비에이&후라노 지역은 대중교통만으로는 관광하기 힘든 지역이라 이동수단을 고민하던 중 버스 투어 상품을 발견했다.
비에이 패치워크–시로가네 온천-흰 수염 폭포-청의 호수-닝구르 테라스 코스로 짜인 1일 투어 상품이었다. 저렴한 가격과 버스로 편하게 관광하는 것 자체도 메리트였지만 무엇보다 예약과 동시에 하루 일정이 해결된다는 장점이 있어서 제대로 계획을 짜지 못한 내게는 망설일 것 없는 선택지였다. 나는 각 코스에 대한 설명은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투어를 예약했다.
알람이 울려 일어나 보니 방에 불은 환희 켜있고 나는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쓴 채 엎어져 자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이었는데… 비에이 투어 출발 시각은 8시 10분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세수하고 이만 닦고 대충 짐을 챙겨 부랴부랴 집결지인 삿포로역으로 뛰어갔다. 숙소가 그나마 근처라 천만다행이었다. 삿포로 역이 큰 편이라 좀 헤매다 북쪽 출구 쪽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을 발견했고 정말 운 좋게 버스 탑승 시간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삿포로 시내를 지나 버스는 외곽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하나둘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파란 하늘과 눈 덮인 산으로 풍경이 바꿨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던 버스는 스나가와 하이웨이 오아시스에 내렸다. 이곳이 휴게소인지 리조트의 휴게 시설인지 착각이 들 정도로 눈 한복판에 있는 휴게소였다.
간단한 먹거리들부터 홋카이도 지역의 특산품, 기념품들을 함께 팔고 있는 곳이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오느라 준비하지 못했던 음료와 간단한 간식을 사서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스나가와 하이웨이 오아시스를 지난 후부터 보이는 거라고는 온통 눈 그리고 나무뿐이었다.
후라노&비에이 지역은 영화나 드라마 광고 등에 나온 명소들이 많다고 한다. 잠시 버스를 멈춰 가며 버스 안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등 광고에 나온 유명 명소를 관광했다. 크리스마스트리도 멋있었지만, 발자국 하나 없이 광활하게 눈이 쌓인 언덕이 더 인상적이었다. 맘 같아서는 당장 버스에서 내려 자박자박 발자국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광활한 눈밭이었다.
비에이 역에 도착, 점심시간 겸 1시간 자유시간이 주어졌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비에이역 주변으로 식당들과 작은 상점들이 모여있는 작은 동네였다. 꾸며지지 않은 일상의 느낌이 나는 곳이라 더 포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눈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 모습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패키지 투어의 장단점은 아주 극명하다. 여러 명소를 저렴한 비용으로 시간 낭비 없이 하루 안에 다 돌아볼 수 있다. 단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순 없다.
1시간이면 딱 점심 먹고 나면 끝날 시간이라 아까웠다. 그래서 점심은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사서 비에이 역사 내에서 해결하고 카메라를 들고 비에이 역 주변을 관광했다.
플랫폼에서 열차 들어오는 것도 보고, 내 허리까지 눈이 쌓인 동네를 걸으며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돼서 다시 투어버스에 올랐다.
투어버스는 점점 더 깊은 눈밭을 달려 이제 정말 주변 반경에 건물을 물론이고 나무조차 드문드문 보이는 눈밭 한복판에 멈췄다.
비에이 패치워크. 여름에는 각기 다른 작물이 심겨 있어 전체적인 밭의 모양이 서로 다른 천 조각을 꿰매어 붙이는 ‘패치워크’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여름에는 이곳이 라벤더 꽃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꽃들로 컬러풀하게 변하겠지만 지금은 눈이 많이 쌓여있고 주변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형물이 없어 하얀 도화지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겨울 비에이의 패치워크의 주인공은 단연코 ‘나무’ 들이다.
투어버스에서 내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켄과 메리의 나무’, ‘세븐스타’의 나무 ‘오야코 나무’ 등을 구경했다. 하얀 눈밭을 배경으로 나무의 수형이나 특징이 더 부각되어 보여 수묵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여유 없이 빡빡하게 늘어선 건물들과 눈에 띄기 위해 색을 더하고 또 더하는 컬러풀한 도시 풍경에 비하면 맥이 빠질 정도로 텅 비어있는 이 무채도의 풍경이 보는 이의 마음에 여유와 평온을 채워 주는 것 같았다.
버스 투어 특전으로 트리 테라스 커피숍에서 커피나 코코아 한잔을 무료 제공해주었다.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사람들은 쪼르르 줄을 서 카운터에서 커피나 코코아를 받아 들고 카페 뒤편에 있는 거대한 눈사람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거대한 눈사람에서 옆에서 우리 모두는 어린이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