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을 파노라마로 즐길 수 있는 현실판 설국열차를 타다!
나는 오늘도 불이 환히 켜진 방에서 어제 입었던 옷을 입은 채 침대 위에서 일어났고 또다시 아침은 먼저 일어나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순간 데자뷔인가 생각하다 시간을 보고 벌떡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왓카나이행 오전 열차를 놓치는 순간 오늘 하루 일정이 날아가버리는 상태라 나는 정말 정신없이 씻고 삿포로 역을 향해 뛰었다. 역에 도착하니 기차 출발시간까지 15분 정도가 남은 상태. 무슨 배짱인지 나는 그 와중에 역 상점에서 삿포로역 한정 에키벤과 커피까지 사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기차를 탔다.
평화로운 홋카이도 풍경과는 상반되게 매일의 시작을 마치 방전되어 있던 차를 점프
케이블을 연결해 시동을 거는 것처럼 다급하고 급작스럽게 시작하고 있었다.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문장 그대로가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왓카나이행 열차를 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왓카나이 여행은 이미 대만족이었다.
말 그대로 설국열차의 현실판이다. 이것보다 평화로운 설경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설경을 열차 안에서 파노라마로 바라보며 보내는 시간 자체가 관광이라고 생각한다.
기차 안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약간 이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판타지가 뭐 별거겠는가…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가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너무도 익숙한 열차 그리고 여전히 사람들 속에 둘러 쌓여 있지만 이곳은 내게 판타지에 가깝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수라장에 있었던 걸 생각해 보면 이곳은 내게 판타지 속 세상이다.
여행 초반에만 해도 계속 울려오는 카톡과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들이 내게 집요하게 들러붙어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직장동료가 일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지친 것 같다고 좀 푹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했을 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어준 친구들이 너 좀 쉬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주변에서도 그걸 느낄 정도인가?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은데?라고 생각했었다.
지쳐 있는 건 나도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주변에서 걱정을 들을 만큼은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했었다.
탄성력이 좋은 사람들은 금방 스트레스나 고통을 받고 쉽게 회복한다. 하지만 나는 스트레스나 고통을 잘 견디긴 하지만 그 스트레스가 사라지지 않고 쌓이는 타입이다. 잘 눌리진 않지만 한번 눌리면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탄성력 없는 스펀지와 같다.
내 감정을 드러내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평소라면 보이지 않았을 나조차도 낯선 나의 감정적인 모습들도 막판에는 많이 보여줬던 것 같다.
괴물이 되는 최악의 상황은 간신히 피하고 아수라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탄성력 제로인 나이기에 그 데미지는 회복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함께했던 그들을 싫어하진 않지만 솔직히 당분간 별로 보고 싶지가 않다가 내 솔직한 기분이었다. 그곳의 기억, 스트레스와 당신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과 같은 의미로 나는 당신들에게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잘 적응하고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니었던 거다.
떠나와서야 알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질려있는 상태였다.
지친다는 쉬면 회복이 가능한 상태지만 질려있는 상태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이미 회복할 수 있는 탄성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연말이라 이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 열차 여행은 다음에도
또 하고 싶을 만큼 좋은데 흔들리는 열차 안에서 장시간 끄적거렸더니 살짝 멀미가 나는
것 같아 펜을 내려놓았다.
열차는 다정하게 인사하듯 이름 모를 역들에 멈춰 섰고 창가 쪽에 앉아있던 승객이 내려 나
는 자리를 창가로 옮겨 앉았다.
설경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이 내게는 천국이고 평화 그 자체였다.
이런 열차라면 하루 종일 타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만큼 즐거운 열차여행이었고
체감시간 2시간 같던 5시간이 지나 열차는 홋카이도 최북단 왓카나이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