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본에서 맞은 새해

일본의 하츠모우데는 몇 시부터 시작되는가?

by missnow

날씨 여파로 출발이 지연됐던 왓카나이-삿포로행 열차는 다행히 올해 안에는 나를 삿포로에 데려다주었다.

2018년 12월 31일 오후 11시가 넘은 시간에 숙소에 돌아왔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거의 기차만 10시간을 타며 앉아있었더니 속이 너무 더부룩해져서 좀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좀 걷고 싶긴 한데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나 고민하다가 떠오른 게 하츠모우데였다.


일본에서는 새해가 되면 각 지역의 신사나 절에 가서 새해 첫인사를 하며 한 해의 소원을 빌고 오미쿠지를 뽑아 한 해의 운세를 점쳐보는 풍습이 있다. 이 새해 첫인사를 하츠모우데라고 하고 새해 첫날 뉴스에서도 각 지역의 신사나 절에 하츠모우데를 하러 모여든 사람들의 인파가 자주 보도되기도 한다.

검색해 보니 숙소에서 걸어서 50분 정도 거리에 홋카이도 신궁이 있었다.

낮이라면 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거리였지만 지금은 자정에 가까운, 버스나 지하철도 잘 다니지 않는 늦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츠모우데가 정확히 몇 시부터 시작하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자정부터 시작한다는 글도 있고 아침에 시작한다는 글도 있는 등 제각각이라 시작 시간을 정확히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야심한 밤에 구글 지도에 의지해 걸어서 50분이나 걸리는 홋카이도 신궁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다고 해도 닫혀 있는 신궁만 보고 허탕치고 다시 돌아와야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숙소에서 편히 맥주 한잔하면서 새해 카운트다운이나 보고 자자 vs 속도 더부룩하고 그래도 기왕 여행 온 거 일본의 새해 분위기를 한번 직접 느껴보자 란 마음의 갈등이 생겼다.


나의 선택은?




밤 12시부터 한다는 인터넷 글과 길치인 나를 구원해줄 구글 지도를 믿고 하츠모우데를 체험하러 홋카이도 신궁에 가보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해돋이 해넘이 행사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처럼 일본에서는 하츠모우데가 매년 TV에도 나올 정도의 풍습이니 분명 나같이 2019년 1월 1일이 되자마자 하츠모우데를 가려는 사람이 있겠지? 그럼 가는 길이 좀 덜 무섭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정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눈 덮인 한적한 낯선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나 혼자였다.

주변 풍경은 새해 첫날에 어울리는 말 그대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풍경이었지만 내 마음속은 긴장감이 가득한 스릴러 영화 속 풍경이었다.

이번 여행 통틀어 정말 처음으로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좀 덜 무섭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애초에 쫄보 주제에 왜 모험을 강행하는가…

일행이 있어서 이 밤에 여길 가지고 했으면 위험하다고 뜯어말렸을 인간이 혼자 있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짓을 종종 하곤 한다.

그나마 일본은 치안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다행이지… 다른 나라였으면 정말 범죄의 표적이다.

이 선택을 한 몇 시간 전의 나를 원망하며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란 생각을 수십 번도 넘게 하면서 쫓기는 사람처럼 겨울밤 거리를 빠르게 걸어 나갔다.


한참을 계속 가다 보니 점차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였고 환청인지 기분 탓인지 멀리서 종소리도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고 주변 풍경이 다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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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에 의지해 계속 걷다 보니 주택가 사이에 신사가 가까움을 알리는 거대한 도리이가 보였다. 그때부터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들 어디서 나타났는지 의심할 여지없이 하츠모우데를 가는 사람들의 무리가 조금씩 늘어났다. 이 밤 혼자가 아님에 안도하며 사람들 무리에 섞여 함께 걸어갔다. 새해를 맞이하러 나온 사람들이 내뿜는 묘한 설렘이 어두운 밤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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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신궁 입구에 도착하니 입구부터 사람들이 가득 차 있어서 경찰관의 안내로 그룹으로 나눠서 이동해야 할 정도였다.

경찰관에 안내에 따라 하늘하늘 내리는 눈처럼 천천히 안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모여있고 길이 꽁꽁 얼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렸음에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눈 내리는 밤의 신궁은 정말 너무나 고즈넉했고 아름다웠다. 정말 작년의 모든 고난을 조용히 정화해주는 것과 같은 평온한 풍경이었다.

그걸 본 것 만으로 야밤에 벌벌 떨며 이곳까지 온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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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조심 안전을 유지해가며 신궁 안에 들어왔고 나는 이곳의 이름 모를 신에게 나답게 살게 해 달라고, 나다운 삶에 어울리는 직업을 찾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올 한 해의 소원을 빌고 신사에서 파는 접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오미쿠지를 뽑았는데 길(吉)이 나왔다.

이름 모를 신이 점지해준 점괘처럼 올해 좋은 일만 가득하기 바라며 뽑은 오미쿠지를 지갑 속에 집어넣었다. 사실 시끌벅적한 축제 분위기를 기대했었는데 너무 늦은 혹은 너무 이른 시간 이어서 인지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것 같은 포장마차들은 별로 없었다. 프랑크 소시지와 솜사탕을 파는 포장마차만 신사 입구에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홋카이도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새해 첫날부터 보는 행운을 얻어서 크게 아쉽진 않았다


다시 구글 지도에 의지해 숙소를 향해 걸었다. 걸어가면서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나라의 길도 헤매지 않게 안내해주는 구글 지도처럼, 내 삶에도 고난과 역경들을 피해 목적지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해주는 지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국 지도보다는 더 중요한 건 목적지까지 걷고자 하는 내 의지일 것이다.

헤매고 빙글빙글 돌더라도 때로는 이게 맞는 길인가 제대로 가고 있는것인가 불안해하면서도 걷는 것을 겁내지 않고 멈추지 않고 계속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오늘처럼 말이다.


2018년만큼 바쁘고 고단하게 살았던 한 해는 없었던 것 같다. 정말 내던지고 도망치고 싶었던 시간들이었는데 버티고 견디다 보니 끝날것 같지 않던 2018년도의 끝은 왔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2019년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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