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학교와 황홀한 냄새를 찾아서
새벽에 하츠모우데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맥주 한잔하고 뻗어서 잠들었다. 그나마 불이랑 TV를 다 끄고 자서인지, 아니면 돌아다니느라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만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 인지 4시간 정도 잔 것 같은데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오늘부터는 1박 2일 하코다테 여행이다. 짐을 싸서 삿포로 역으로 이동, 삿포로-하코다테행 열차를 탔다.
삿포로-왓카나이행 열차가 설국열차였다면 오늘은 바다열차였다. 가는 내내 바다가 보였다.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동 자체가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코다테는 홋카이도 남부에 있는 도시로 아름다운 야경, 해산물, 항구 주변의 관광지가 유명한 도시다.
2009년 처음 하코다테에 방문했을 때 나도 가이드북에 소개된 대로 하코다테의 대표적인 관광지들을 관광했었다. 하지만 하코다테 여행 이후 내 기억 속에 남은 건 아름다운 야경도, 멋진 항구 풍경도, 고풍스러운 트램도 아니었다. 내 기억 속에 남은 하코다테는 의외로 이 2가지였다.
#다시 학생이 된다면 다녀보고 싶은 학교
#수산센터에서 맡았던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냄새
2009년에 갔을 때 하코다테의 유명 관광지는 이미 다 가본 터라 이번에는 지난번에 가보지 않은 곳들 위주로 여행 코스를 짰다. 지난 여행에는 하코다테가 마지막 여행지여서 누구 하나 서운하지 않게 기념품을 사 가자!라는 마음 때문에 제대로 여행을 즐기지 못했었다.
낮 시간에는 주로 베이 지역에서 관광과 기념품 쇼핑을 하고 시간을 보냈기에 하코다테 시내 풍경은 거의 밤, 야경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거닐며 햇살 아래 탁 트인 하치만자카에서 하코다테 시내 전경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로망의 학교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그 황홀한 냄새를 다시 맡고 싶었다.
여행 5일째. 5일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누구의 말도 들어주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떠나오기 전에는 스트레스를 받아 에너지의 핵마저 깨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점술가가 점칠 때 쓰는 수정구의 중심에서 에너지의 파장이 계속 뻗쳐 나와 수정구가 깨지기 직전의 상태와 같았다.
다행히 깨지진 않았지만 더 이상 어떤 자극에도 에너지가 생성되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수정구 안에 떠돌던 미약한 에너지들이 이제 조금씩 응집하는 기분. 그렇게 스르륵 물이 스며들어 차오르듯 에너지가 회복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내 온 신경세포에 돋아나기 시작해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올랐던 염증들이 이제 좀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 내게 몹시 필요했구나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내게 덕지덕지 들러붙어있던 것에서 벗어나 원래의 ‘나’를 회복하는 시간.
어떤 행위를 통해 발산해서 풀리는 스트레스도 있지만, 스트레스를 해소한다와 에너지를 회복한다는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 공간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으로 벗어나 외부로 뻗쳐있던 신경 줄을 다시 내 안으로 흡수해 ‘나’ 에게 집중 하기. 이게 내가 에너지를 회복하는 방식인 것 같다.
여행 내내 누구와도, 혼잣말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간 내 안에 쌓여 있던 말들을 끄집어냈더니 다이어리 하나를 거의 다 채워갔다.
첫 번째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을 다 채우고 다이어리를 집어넣었다.
하코다테도 오타루와 마찬가지로 예전보다는 관광객이 많이 늘어난 것 같았다.
기차에서 내려 10년 전 묵었던, 역에서 도보 2분 거리의 호텔로 걸어갔다.
여전히 호텔의 위치는 탁월해서 역에서 내리자마자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바로 호텔 로비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10년 전에는 가성비 좋고 꽤 세련된 느낌의 호텔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여전히 가성비는 훌륭했지만 꽤 많이 낡은 느낌이었다.
로비에서 키를 받아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나는 내 기억 속의 호텔이 정말 이곳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릴 적 신나게 놀았던 놀이터를 오랜만에 다시 찾아갔는데 예전에는 크고 놀거리가 많았던 그곳이 작고 초라해 보이는 느낌과 같았다.
A, B관으로 나눠져 있던데 내가 지난번에 머물렀던 곳은 B관이었던 걸까?라고 생각하던 중
아.. 10년 전이면 낡을 만도 하지란 생각이 들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휩쓸려 호텔도 낡고 나도 늙었는데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건 내 기억뿐이었나 보다.
낮의 하치만자카가 보고 싶어 호텔에 짐을 푼 후 노면 열차 1일권을 사서 모토마치 쪽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참 대단한 언덕 그리고 빙판길.
모토마치는 정말 겨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여기서 어떻게 살지? 가 걱정될 정도로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아차해서 미끄러지면 정말 100미터는 그대로 미끄러질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언덕.
이렇게 높은 언덕에 있어서 굳이 하치만자카에서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도 막힘 없이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하치만자카는 오히려 관광객들로 너무 붐벼서 탁 트인 느낌은 좀 덜했고 그 옆의 길이 더 탁 트인 느낌이 들어서 나는 더 좋았다.
그리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언덕 위에 위치한 하코다테 니시 고등학교.
실제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운 등굣길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참 아름다운 곳에 있는 학교라고 생각한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서 꼭 학교를 다녀보고 싶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발견한 고코쿠 신사.
진짜 잘못하면 여기서 바로 하늘나라로 직행하겠다 싶게 가파른 곳에 있어서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꽝꽝 얼은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조심 올라가니 신사가 나왔고, 신사에서 내려다본 시내 정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하치만자카는 비할 때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바라만 봐도 좋을 정도로 참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모토마치 신사에서 내 주위 사람들의 안정과 행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