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마시는 술이 더 맛있는 이유
계획대로라면 아침 일찍 일어나 하코다테 역 근처 새벽 시장을 구경 후 해산물 덮밥이 유명한 식당에서 아침을 먹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찍은 일어났으나 어제 너무 추위에 떨고 긴장을 해서 인지 몸이 너무 피곤했다. 이 피로를 무릅쓰고 새벽부터 일정을 시작하기엔 성게 알 덮밥이 그다지 끌리진 않아서 늑장 부리면서 계속 잤다. 너무 많이 자는 거 아닌가 싶어서 시계를 보니 열차 출발 30분 전…
후다닥 짐을 싸서 역으로 뛰어갔다. 호텔이 역에서 2분 거리인 게 천만다행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열차에 탄 후 이동시간에 사진과 다이어리를 정리하려는 야심 찬 계획으로 노트북을 가방에서 꺼냈으나 삿포로역에 도착할 때까지 노트북은 펼치지 못하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쿨쿨 자버리고 말았다.
여행 6일 차. 여유롭게 다니자는 다짐이 무색하게 계속 빡빡한 일정으로 돌아다니고 있어서 피로가 쌓이고 있었다.
여행의 시작점이었으나 계속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다니느라 삿포로를 제대로 관광하지 못했다. 오늘은 말 그대로 삿포로 시내 관광일정이었다. 예약해둔 호텔은 역에서 멀지 않아 금방 찾을 수 있었고 시설도 깔끔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짐을 넣으러 들어가 보니 이번 여행 중 제일 좋은 방이었다.
방 컨디션만 보면 숙박비가 지금까지 묵은 곳들의 2배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평일이라 그런지 가격 차이도 별로 나지 않았다.
여행을 할 때 나는 좋은 숙박시설에 우선순위를 두는 편은 아닌데 이 방에 들어와 보니 여행의 최우선 순위를 좋은 숙박시설에 두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편안한 휴식이 보장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앞으로의 여행에서 우선순위가 좋은 숙박이 될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여행의 마지막 날에는 좋은 곳에서 묵는 게 여행 마무리에 좋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짐을 방에 두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차림새로 호텔 밖으로 나갔다. 홋카이도에 왔으니 그래도 돈 좀 주고라도 게를 먹자!라는 생각에 삿포로에서 유명한 게 전문점인 카니혼케 본점과 스스키도 점에 갔으나 마침 브레이크 타임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그 후 또 다른 게 요리 가게에 갔는데 이미 만석이라 실패... 첫날 왔을 때 보다 삿포로의 날씨가 추워져서 더 이상 밖을 돌아다니다간 눈사람이 될 것 같았고 배가 너무 고파 근처에 보이는 쇼핑몰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쇼핑몰처럼 맨 위층에 식당가가 있었고 메뉴판에 붙은 돼지고기 덮밥 사진이 맛있어 보이는 가게에 들어갔다.
돼지고기덮밥과 옥수수튀김을 주문한 후 메뉴판을 보니 노미호다이(음료 무제한)라고 쓰여있는 것 같아서 우선 사와를 시켰다.
음식 나오기 전에 먼저 나온 매실 사와부터 시작해서 식사를 하면서 포도사와, 맥주를 계속 주문했다. 낮부터 가볍게 반주로 마시기엔 적지 않은 술을 마셨지만 술 자체도 맛있었고 돼지고기덮밥과 옥수수튀김 역시 사진을 능가하게 맛있어서 게를 못 먹은 아쉬움은 바로 사라졌다.
배도 불렀고 여기서 더 마시다간 주정뱅이가 될 것 같아서 계산을 하고 나왔다. 계산할 때 보니 노미호다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술 값이 별로 비싸지 않았고, 술 값이 비쌌다고 해도 마셨을 것이다. 크게 기대 안 하고 들어간 집이었지만 만족스러운 점심이었다.
쇼핑몰을 구경하고 나오니 벌써 해가지고 있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한가롭게 다니고 있었는데 시간은 더 빨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쇼핑몰에서 나와 가족에게 부탁받은 물건들을 사기 위해 돈키호테에 갔다. 돈키호테는 일본 여행을 온 대다수의 관광객이 여행 마지막에 꼭 들리는 곳일 텐데 참 올 때마다 이곳의 혼잡스러움에는 치를 떨게 된다.
가격이 드라마틱하게 싼 것도 아니고 보통 돈키혼테에 파는 것들은 다른 상점들에서도 팔고 있어서 굳이 돈키호테에서 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나처럼 쇼핑하는 것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사람 붐비고 정신없는 곳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돈키호테를 추천하지 않는다.
나도 이번엔 돈키호테가 아닌 다른 곳에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짐을 좀 나눠 담을 쇼핑백이 필요해서 눈앞에 제일 먼저 보인 돈키호테에 들어갔다.
홋카이도 여행 내내 본 사람들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통로 가득 비좁게 물건들이 진열돼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과 계속 부딪치고 전 세계 말이 다 들려오고..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이곳에 들어와서 새삼 또 깨달았다. 나 지금 사람에 치이는 게 진짜 몹시 싫구나…
그래서 서둘러 돈키호테를 빠져나와 제일 가까이 보이는 상점으로 들어갔다.
돈키호테에 비해 이 상점은 정말 사람 밀도가 현저하게 낮고 매장도 훨씬 넓어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아까 사지 못했던 부탁받은 물건들을 사서 나왔다.
부탁받은 것들은 그래도 다 사서 마음은 가볍고 두 손은 무거운 상태로 다시 숙소에 들어가 짐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이대로 숙소에서 하루를 마무리해도 좋을 시간이었지만 점찍어놓은 곳이 있어서 동네 마실 나가듯 주머니에 현금과 핸드폰만 넣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첫날 묶은 호텔 건물 옆에 있던 꼬치구이집!
마지막 날 저녁은 꼭 여기서 먹어야지 하고 점찍어 놓고 있던 꼬치구이집에 도착했는데 늦은 시간에도 대기줄이 있었다.
사실 오밤중에 꼬치구이 집에 혼자 가기 좀 그래서 입구까지 와서도 들어갈까 말까 고민했는데 다행히 카운터 석이 있어서 혼자 가도 괜찮을 것 같아 기다리기로 했다. 밖에서 조금 대기를 하다 자리에 앉은 게 밤 10시 15분이었는데 왜 그렇게 다들 문을 빨리 닫는지 11시까지 라스트 오더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들어가서 앉자마자 닭꼬치, 닭 날개, 소고기 베이컨 떡말이 꼬치를 한꺼번에 주문하고 맥주를 주문했다. 늘 그렇듯 맥주가 먼저 나와 마시는데 이거지… 이 맛이지…
이번 여행을 하면서 적어도 4개 이상의 가게에서 삿포로 생맥주를 마셨는데 제일 맛있었던 곳이 양꼬치 집 다루마 생맥주였고 두 번째가 이 꼬치구이집이었다. 다른 곳에서 마신 것도 물론 맛있었지만 다루마와 이곳의 생맥주는 벨벳처럼 스르륵 하고 거슬리는 것 없이 넘어가는 맛이었다.
이런 맥주라면 안주 없이도 세 잔은 그냥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꼬치구이가 나오기도 전에 맥주 한잔을 다 마셨고, 꼬치구이가 나온 후 다시 한잔을 추가 주문했다. 그러고 나서 곱창구이와 닭 날개 구이를 추가한 후 레몬 사와를 시켰는데 레몬 사와는 또 맥주와는 다르게 깔끔하게 맛이 있었다.
꼬치구이의 느끼함을 싹 잡아주면서 식욕을 자극하는 상큼함...
생각해보면 2009년 이후로 혼자 일본 여행을 3번 정도는 왔었던 것 같은데 그때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마무리는 늘 꼬치구이집이었다. 안주도 저렴하고 맛있고 다양한 종류의 술을 한자리에서 마셔볼 수 있어서 꼬치구이 집을 좋아한다.
가게가 좀 일찍 문을 닫는 게 아쉽지만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었으면 밤새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도 밖에서 혼술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여행 오면, 특히 일본 여행에 오면 거리낌 없이 혼술을 하게 된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것도 혼술이나 혼밥을 하기에 거리낌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간단히 술을 마실 수 있는 식당들이 많아서 일지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한하게 맥주가 정말 맛있다.
술 자체가 맛이 다르다기보다 여행 와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마셔서 그런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스트레스로 속 시끄러운 나를 달래기 위해, 고통스러운 무언가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서 여행지에서의 술은 더 달고 맛있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내 옆에 앉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마시는 술은 지금 나처럼 맛있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도 이 사람들의 하루의 힘겨움이 한잔의 술로 풀어지기를 바라며 여행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