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여행을 마치고 나서

내가 이번에 배웠어야 하는 건 “나”를 포기하는 방법이었다.

by missnow

2020년 1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 25분

여행 다녀온 지 거의 이주가 되어 간다.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보다가 아직 마음과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어 몇 페이지 남아있는 여행 다이어리에 마저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12월 24일로 퇴사 날짜가 결정되고 난 후 12월 내내 휴일 없이 근무했다.

퇴사 당일인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철야, 휴일인 크리스마스에도 출근을 한 후 26일 오전까지 아무도 없는 텅 빈 사무실에서 나는 계속 일하고 있었다. 나는 26일부터는 이 사무실에서 사라져야 되는 사람이었다.

26일 오전 8시 30분… 40분…

이제 곧 사람들이 들이닥치게 되는 그 시간까지 여전히 나는 다 끝내지 못한 일들을 붙잡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하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 깨달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시간 내에 완벽하게 마무리를 못한다는 것을.

애당초 받을 사람도 없는 인수인계, 한동안은 누구도 확인하지 않을 끝나버린 프로젝트 보고서에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다는 것을…

사실 내 고집이었다. 내 방식을 고집하고 싶은 나의 고집…

그 누구도 내게 희생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강요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먼저 퇴사를 했거나 퇴사를 당한 상태였으니까.

조금만 더하면 정리가 끝나고 아무런 마음의 부담감 없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지막까지 밤을 새웠는데도 일은 결국 끝나지 않았다.

그 순간에서야 나는 내가 지금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하루 더 철야한다고 해서 일이 끝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나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그 시간에 있었다. 뭘 더 포기해야 하는 거지?...


이미 엉망진창인 상황에서, 모두가 손을 놔버린 이 일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건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다른 회사나 사람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자란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실 솔직한 마음은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도덕적인 가치관 때문이라기보다 내 방식, “나”를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끝을 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마지막에서야 내가 진짜 이 시련 속에서 배웠어야 하는 건 끝까지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상황을 인정하고 “나”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게 아니라, 몸의 힘을 풀고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현실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던 프로젝트 파일, 보고서, 인수인계 파일 정리를 놔두고 나는 그 자리에 있는 걸 들키면 안 되는 사람처럼 도망치듯 서둘러 짐을 쌌다.

그렇게 허겁지겁 사무실을 나오다가 결국 한 사람에게 걸렸다. 출근을 제일 일찍 하는, 우리 모두를 퇴사시킨 부사장님에게...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냐고 오늘부터 안 오는 거 아니었냐고 그는 물었고

(그는 내가 25일에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다는 건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정리할 일이 있어 잠깐 들렀다고 했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사무실을 나왔다. 사무실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아침햇살이 너무 쨍해서 눈이 아플 정도였다. 건물 밖을 나와 걷는데 사무실 건물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혹시라도 출근하는 동료를 만날까 봐 나는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출근길과 반대방향의 플랫폼에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탄 후 댐이 터진 듯 상념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친했던 직장동료가 나한테 자주 했던 이야기가 내려놓으라는 거였다. 좀 내려놓으라고... 맞다. 내가 이 회사에서 배워야 했던 건 바로 내려놓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 끝에 끝까지 내려놓지를 못해서 스스로를 갉아먹고 주변을 원망했다.

결국 내려놓지도 벗어나지도 못했던 것이다.

내 힘으로 내 노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다.

일도 다 마무리하지 못한 채, 그렇다고 여전히 내려놓지도 못한 채 일단 고향 집으로 내려갔다. 집에 내려가서 나는 그간 내가 얼마나 찌들어있었는지를 다시금 느꼈다. 미친 듯이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그제야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참 작년 12월은 다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험난한 한 달이었다.

정말 이 구역의 미친 X가 되기 직전까지 내몰렸고 매 순간순간이 고비였다. 이렇게 그 시기를 회상하며 다이어리를 쓰는 시간은 상상도 못 했을 정도로 정말...


그런 상태에서 홋카이도 여행을 간 거다.

처음에 홋카이도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타르를 뒤집어쓴 새와 같은 상태였다.

검은 타르 구덩이에서 간신히 발버둥을 쳐서 빠져나오긴 했는데 발부터 시작해서 깃털 하나하나까지 타르가 끈적하게 들러붙어있어 괴로워하는 새처럼 떠나왔음에도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실 여행 첫날까지만 해도 어차피 앞으로 시간도 넘쳐나는데 여행 일정을 왜 이렇게 촉박하게 잡았나.. 그래서 결국 마무리는 마무리대로 못하고 여행 계획은 여행 계획대로 못 세웠구나 싶어서 스스로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시기에 다녀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계속 일에 질질 끌려 다녔을 게 분명했고 일을 다 마무리한 후에는 너무 지쳐서 오히려 여행 갈 계획 같은 건 세우지 못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여행지를 홋카이도로 결정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나에겐 공백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공백의 시간. 나를 나와 연관된 모든 것들로부터 시공간적, 정서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탁 트인 하얀 공백 속에서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많은 것들을 비우고 지워가며 점점 “나”를 회복해 갔다.

여행 내내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간 참 답지 않게 많은 말을 하며 살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어증에 걸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 내내 나는 여행과 나 외에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먹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았다. 여행하면서 나는 내 얼굴 특히 눈빛과 표정을 보고 조금 놀랐다.

출퇴근할 때 그 삭막하고 건조했던 표정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행복하고 편안해 보이는 표정과 눈빛으로 점점 바뀌어 가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공백의 시간이 지났다. 그 공백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많이 괜찮아졌다.

그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처럼 회복되기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거고 어쩌면 혼자 힘으로는 회복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홋카이도는 넓고 광활해서 막힌 마음을 뻥 뚫리게 해 주면서도 포근한 느낌이 있다.


2009년 일본 생활을 마무리할 때 처음 홋카이도에 갔었고 2018년 지긋지긋했던 두 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난 후 다시 홋카이도에 갔다. 다음에 어떤 계기로 이곳을 방문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공백의 시간 필요할 때 나는 이곳을 떠올릴 것 같다.

2018년 12월. 그 충만한 공백과 치유의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그나마 빨리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18년 공백의 시간은 여기서 마무리한다. 비웠으니 이제 또다시 채워나가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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