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북단 소야미사키에서 올 한 해의 나를 흘려보내다.
왓카나이 역에 내리자마자 버스터미널로 이동해 소야 미사키 행 왕복 버스 티켓을 샀다. 러시아에 가까운 땅이어서 그런지 모든 간판에 러시아어가 같이 표기되어 있어 이색적인 느낌이 들었다.
(러시아 사할린까지 43km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왓카나이는 러시아에 가까운 지역이다)
한적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당일치기 관광객이 꽤 있어서 버스는 만석으로 출발해 소야 미사키에 도착했다.
차가운 공기, 탁 트인 바다 그리고 끝이라는 상징성이 주는 왠지 모를 해방감까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막힌 속이 뻥 뚫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거면 됐다. 관광지로서 가치는 모르겠고 나에게는 가치가 충분했다.
이 느낌을 원해서 이곳까지 온 거니까…
소야미사키 해안가 근처에는 텐트와 바이크족들의 바이크가 주르륵 늘어서 있었다.
왠지 관광객들의 모습이라기보다 먼 여행을 떠나기 전 서로 온기를 나누며 잠시 이곳에서 쉬어가는 철새 무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어떤 의미를 찾겠다고 당신들과 나는 이곳에 찾아온 걸까...
조금만 넉살이 좋았다면 그 바이크족들과 함께 해넘이와 해돋이를 맞이할뻔했다. 한 해의 끝 소야미사키에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지만 답답하진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있어서 왜인지 모르게 위안이 됐다.
소야미사키를 둘러보고 소야미사키 공원에 올라갔다.
언덕 위에 독특한 모양의 조각이 있어 다가가 설명문을 읽어보니 대한항공 007편 항공기 피격사건의 위령비인 기도의 탑이었다. 이 언덕 자체가 평화를 기원하고 상징하는 기원의 장소였다. 나는 평화의 종을 치며 희생자들의 안녕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평화를 기원했다.
바람의 길을 막는 건물이 없어 바람은 막힘 없이 바다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사방이 탁 트인 언덕 위에서 종소리는 바다를 향해 울려 퍼졌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결 위에 올라탄 종소리에 실려 내 안에 막혀 있던 감정의 응어리들도 분출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덕 위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시설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서 가득 쌓여있던 내 안의 응어리들이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 보낸 건 40분의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왠지 나는 내 안에 쌓였던 한 해의 일부를 흘려보내고 온 기분이 들었다.
왓카나이 역에 도착 후 열차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역 주변을 산책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하늘이 보랏빛으로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왓카나이는 묘하게 아이슬란드나 블라디보스토크와도 좀 닮아있는 느낌이다. 북쪽에 있는 도시들은 공통적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집 같이 심플하고 삭막한 느낌이 있다. 텅 비어있어서 삭막해서 나는 북쪽의 도시들이 좋다. 복잡했던 내 머릿속과 마음속이 홀가분해진다.
계속 걷다 보니 바다가 나와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또 한참을 서있었다.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고 내게 눌어붙어있던 감정의 딱지마저 떨어져 날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올해 내내 지병이 없음에도 종종 숨쉬기가 힘들어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쉬곤 했었다.
생각해보면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곳에서 벗어나니 이제 좀 숨통이 트이고 숨을 쉬는 게 편해졌다.
이제야 나는 좀 살 것 같았다.
산책을 마치고 근처에 문 연 식당이 하나도 없어서 역 안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찹쌀떡을 사서 먹고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안내 방송이 나왔다.
5시 47분에 왓카나이 출발 10시 50분에 도착하는 삿포로행 마지막 열차가 날씨 영향으로 지연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나는 내년에 삿포로에 도착하려나 보다.
내년에 삿포로에 도착해도 아니 내년이 오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