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샐러리
사실 나는 노동청에 방문하지 않았고 제목은 내 얘기가 아니다. 퇴사 후 예상대로 월급이 들어오지 않아 그 즉시 우리는 민원을 제출했다. 온갖 서류와 카카오톡 기록 같은 걸 박박 긁어다 첨부했다. 그런 다음 주쯤 카페에서 밍기적거리며 자소서를 쓰다가 올리브에게서 모두를 대표해 노동청에 출석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이가 많다’는 게 대표로 뽑힌 이유라니 참 손쉬우면서 편협하다고 생각했다. 올리브는 넷 중 가장 늦게 입사한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빠릿빠릿한 올리브가 총대를 멘다는 것 자체는 잘된 일이었다. 실제로 올리브는 일 처리가 지연되거나 궁금한 게 생길 때 즉각적으로 전화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능한 한 전화하지 않고 일이 진행되길 바라는 나랑은 다르게. 노동청 출석 날짜도 금방 정해졌고, 그 김에 우리도 만나 노동청 후기도 듣고 오랜만에 얼굴도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출근을 안 해도 됨의 기쁨은 솔직히 유효기간이 2주다. 규칙적인 취침과 기상, 정기적인 만남과 교류, 성취감과 소속감이 모두 부족한 백수 생활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질 즈음, 노동청 출석일이 다가왔다. 노동청은 을지로 어드메였고, 우린 삼청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노동청 방문 시간이 9시였고 넉넉하게 11시쯤 북촌의 브런치 가게에서 보자고 약속이 정해졌다. 백수가 아니더라도 브런치를 브런치 시간에 먹는 건 참 드문 일이다. 12시는 되어야 뭉그적대며 침대에서 눈을 뜨는 날들을 보내던 중, 이날만은 9시에 번쩍 눈을 뜨고 서둘러 준비했다. 서두르는 행위도 참 오랜만이었다. 물론 올리브는 한참 더 일찍 일어나 이미 담당관을 만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집에서 삼청동 브런치 집까지 45분쯤 걸린다기에 준비를 마치고 10시에 집을 나섰다. 나는 약속 시간을 잘 헷갈리고 이동 시간을 잘 계산하지 못하는 편이라, 길 찾기 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45분 걸린다는 결과가 나오면 1시간 전에 출발하는 식이다. 그럼 보통 불운의 불운이 이어지는 배차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이번에도 다행히 50분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다행히 노동청에서 슬슬 걸어오겠다던 올리브와 다른 둘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마침 4인석이 한 개 딱 남아 있었다. 운도 좋지! 나는 일행이 오면 주문하겠노라 말해두고 단톡방을 열었다. 엥, 근데 올리브가 이미 와 있다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우리의 약속 장소는 소격동 삼청한옥점, 내가 가방을 내려둔 이곳은 안국동 본점이었다. 운도 좋지, 취소!
다행히 두 지점은 10분 거리로 떨어져 있어서, 샐러드 친구들을 금방 만날 수 있었다. 샐러드와 오픈 샌드위치 같은 가벼운 식사에 그간의 근황, 올리브의 노동청 후기를 곁들였다. 모두 증언이 일치하니 처리가 잘 됐고, 대표도 출석일을 받아두었다고. 그런데 세심한 성격의 올리브는 담당관의 무심한 태도에 상처를 받았는지 한 명 한 명 도착할 때마다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했다. 아니, 담당관님이 우리는 그나마 나은 케이스라는 거예요! 이렇게 협조 잘해주는 회사 별로 없다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상습적인데 회사에 불이익은 없어요? 막 그랬죠. 근데 힘든 회사니까 어쩔 수 없다고 회사 편을 들더라고요! (Spoiler Alert! 이후의 일이지만 대표는 정해진 일자에 출석하지 않았다.) 노동청의 담당관들은 임금 체불 외에도 산재, 폭력 등 정말 수도 없이 많은 노동 이슈를 겪겠지. 공무원인 그들에게 감정적인 응대를 바랄 순 없는 거겠지. 그런 이야기로 서로를 토닥거리긴 했지만 작고 소중한 월급마저 떼 먹힌 사람을 두고 굳이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밥을 먹은 다음에는 문구 편집샵도 구경하고 4컷 사진도 찍으며 자리를 이동했다. 사실 당신들이 좋아할 게 분명하다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카페로 모두를 이끌었다. 취향을 찾는 사람들을 콘셉트로 하는 카페였는데, 한쪽에는 여러 사람의 취향으로 분류해 놓은 서가가 있고, 또 한쪽에는 달의 콘셉트에 맞게 플레이리스트를 꾸린 MP3 선반이 있는 곳이다. 체리 색 원목 가구와 맛있는 차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취향에 걸맞은 공간이었는데 책을 좋아하는 이들 역시 이곳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다들 상기된 얼굴을 하고 두리번거리다 역시나 책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죠?”하고 몇 번이나 확인받았고. 출판사에서 책에 그렇게 데었는데도 여전히 책을 좋아하는, 늘 가방에 책 한 권씩 넣어 다니는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
이 사람들과 뭔가를 또 함께하고 싶었다. 전 직장에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이다. 퇴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각을 재던 시점부터 나는 회사 밖에서 계속 이들과 무언가를 함께 하며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다들 한두 권씩 책을 골라 가장 큰 중앙 테이블에 앉은 김에, 무작정 책을 만들자며 노션 페이지를 만들었다. 연말이 오기 전까지 책을 만들자! 다들 선선히 제안에 응했고, 목표와 대강의 목차를 적으며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늘어놓고 있자니 신이 나는 것도 같았다. 들어갈 내용을 구상하면서 간단히 일에 대한 가치관을 나누기도 했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보기도 했다. 영어 표현 중에 ‘Move on’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간의 일을 맺고 새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정리하면서, 다른 회사로든 나은 미래로든 비로소 move on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자꾸 시작하자고 들이미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경험해 본 사람도 있고, 꾸준히 끌고 가는 힘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현실적으로 쳐내주는 사람도 있고. 꽤 잘될 것 같은데? 어차피 일은 마감이 해주기 마련이라고,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비추어 본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다니, 운도 좋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