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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Nov 26. 2023

아주 사적인 취미를 만드는 법

글 병아리콩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취미를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흔해 보이는 ‘독서’나 ‘영화 감상’이 아니라 독특하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수영, 합기도, 필라테스, 헬스 등 다양한 운동을 시도했지만 매번 단기간에 그쳤고 어릴 때 그나마 좋아했던 피아노는 집 한구석에 먼지가 가득 쌓여 방치된 지 오래다. 손재주가 워낙 안 좋아서 플라스틱 자가 있어도 줄 하나 똑바로 못 긋는 사람이 바로 나다. 여가 시간에 하는 일도 무난하기 그지없다. OTT 시리즈 몰아보기, 지인들과의 약속에 나가기, 이불에 들어가 책 읽기·····. 나도 색다른 취미를 즐기며 성장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데 쉽지 않다.


“사회초년생이나 취업준비생에게 추천할 만한 책 소개하기”로 이번 원고 주제가 정해졌을 때, 다양한 소재가 떠올랐지만 취미를 틈틈이 만들고 가꾸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고된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일’ 운운하는 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가고 고유한 길을 개척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더없이 중요한 주제일 수 있다. 힘든 레이스에서 취미는 딴 길로 새는 일이 아닌 훌륭한 활력소이자 생각하지도 못한 길을 보여주는 열쇠임을 나도 깨닫는 중이니까.


여가 시간 보내기로는 단연 무색무취였던 파워 집순이인 나는 최근 ‘답사’라는 취미 새싹을 기르기 시작했다. 단순히 장소를 둘러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의 역사와 문화를 충분히 공부하려 노력하기에 ‘답사’라고 이름 붙였다. 가이드 해설을 예약해 듣기도 하고 관련된 책이나 다큐멘터리도 본다. 현장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싶어서 선물 받은 저렴한 필름 카메라로 어설프게 사진도 찍고 앨범도 만든다. 팸플릿을 모으고 블로그에 관련 포스팅도 한다. 그러니 ‘답사’라는 한 단어 안에 꽤 다양한 활동이 담겨 있는 셈이다. 


시작한 계기는 다소 진부하지만, 애인 덕분이다. 나와 달리 활동적인 야외활동을 선호하는 그는 지도 앱에 즐겨찾기 해둔 장소가 수천 개이고, 지출의 대부분을 여행에 투자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여행의 매력을 도통 모르겠지만, 여행을 즐기는 사람을 동경했던 나는 뱁새가 황새 따라 하듯 그를 따라 국내로, 국외로 틈틈이 돌아다니며 재미를 익혔다. 그렇게 스스로 느낀 바로는, 취미를 만들고 싶지만 당장 끌리는 일이 없다면 동경하는 일로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특기가 아닌 취미이니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 또한, 어느 정도의 반강제성도 필요하다. 재밌지 않다고 그만두면 안 되기 때문이다. 지루한 순간을 넘겨야만 찾아오는 재밌는 순간을 맞이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정을 수차례 겪어야 취미로서 공고해진다. 최근에는 토요일 아침부터 일어나 경복궁에 다녀왔다. 경복궁역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며 내가 왜 사서 고생을 하냐, 하다가도 끝내주는 단풍을 구경하고 뜨끈한 만두전골을 먹으며 이게 인생이지! 외친 뒤 ‘궁궐 산책’을 좋아하는 일에 추가하는 식이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이라는, 취업준비생이나 사회초년생을 위한 책으로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내 경험과 유사한 취미 기르기의 과정이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 김서울은 전통회화를 전공했고 박물관과 유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사람이지만 궁궐과는 데면데면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주요 계기는 단순히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책 출판이라는 명백한 동기를 위해 서울의 다섯 궁궐을 오가며 쓴 이 책에는 낯선 어색함부터 따뜻한 애정까지의 궁궐에 대한 솔직한 감정변화가 담겨 있다. 궁궐의 역사와 문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극히 사적인 궁궐 취향을 담은 에세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의 다섯 궁궐부터 고궁박물관까지 거침없이 넘나들며 좋아하는 나무와 꽃, 돌 등을 한 자리에 모아 신나게 설명한다. 궁궐 바닥에 깔린 돌인 울퉁불퉁한 박석과 혀를 쏙 내밀며 메롱하는 해치가 어떻게 자신을 사로잡았는지 말한다. 


쉽고 친근한 이 에세이는 역사와 전혀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추천할 만하며, 답사라는 취미를 기르고 싶은 사람에게는 좋은 시작점이 되어 줄 것이다. 조선 5대 궁궐은 주말은 물론 퇴근 이후에도 둘러볼 수 있는 부담 없는 장소다. 이 책을 읽고 글을 떠올리며 창덕궁을 산책해 보고, 다음엔 경복궁에 방문해 비교해 보고, 궁궐에 대한 다른 책도 읽어보고, 궁궐 해설 가이드도 신청해 보자. 재미가 붙는다면 궁궐을 넘어 다른 공간을 탐험하며 영역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답사’라는 취미에 갓 입문한 나는 이 책을 추천하지만, 좋아하고 동경하는 분야에 대한 가벼운 책을 통해 ‘나만의 사적인 취미’를 만들어 보라는 말을 제일 하고 싶다. 좋아하고 설레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든 놓지 않으면, 언제나 내일을 기대하게 되니 말이다.


돌계단을 보면 괜스레 설레곤 했다.

특히 홀로 산책을 하다 이런 길을 만나면 비밀스레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기분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 그 옆의 부드러운 나무와 풀들.

이런 고궁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 김서울,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놀, 202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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