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올리브
‘갭이어 Gap-year’. 명칭을 알게 된 건 작년 여름이었다. 21년도에 제주살이로 쉼을 찾아 떠났던 그때는 일단 퇴사 후 시간이 많았으므로 쉬면서 글도 썼고, 사람들도 만나면서 차근차근 꿈을 향한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잘 쉬었다는 생각과 함께 전 직장으로 되돌아갔던 작년은 내게 너무도 힘겨운 나날이었다. 나는 쉼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꿈을 성취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충분히 1년을 쉬었지만, 직업을 바꿀 기회를 놓쳤고 성취하지 못해서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싫었다. 그 사이 두 번째 출판도 하고 좋아하는 일을 잔뜩 벌여 놓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직업으로서의 성취가 없었다. 그래서 돌아온 직장에서는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스트레스는 몸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건강이 망가지면서 나는 진지하게 휴직을 고민했다. 그때 읽었던 책이 바로 김진영의 다큐에세이,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이다.
당시 나는 이름하여 아홉수 병에 걸린 29세였고 마지막 20대라는 생각에 괜히 조급했다. 이직 기회는 마지막이라는 조바심도 들었다. 누구도 나를 떠밀지 않았는데 스스로 벼랑 끝에 있었다. 그래서 맞지 않는 직장 생활을 알면서 모르는 척 이어가는 것이 더욱 힘겨웠다. 힘겨움에 하루하루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찾아와 준 이 책은 나를 따스하게 위로해 줬다. 조급함은 이상적인 나에 대한, 내가 그려놓은 모습이 아닌 것에 대한 조급함이라고 했다. 동시에 초심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일을 선택했을 때의 첫 마음가짐 말이다. 나는 교정을 밟고 아이들과 교실 속에서 행복한 나를 그렸었다. 일 년 정도 교직 생활을 하고 나니 모든 열망은 채워졌다. 더 이상 일에서의 만족감이 없었다. 병설에서 단설로 환경이 바뀌었지만 똑같았다. 어느 순간 교실 밖에서 내 모습을 떠올렸고 그 행복감이 더 크다는 걸 깨달았다.
책에서는 일과 삶에 대한 가치관을 준비하는 그 시간을 갭이어라고 불렀다. 취업 준비도 아니고 창업 준비도 아니고 이직 준비도 아니었다. 삶의 갈림길에서 더 나은 목표 설정을 하는 시기였다.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다음 스텝이 없어도 괜찮았고 그저 여기서 더 가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으로 보냈다. 그리고 멈추자는 용기를 얻었다.
우리는 언제나 온전한 쉼을 바라면서도 막상 어떤 준비도 없이 쉼을 맞이하게 되면 불안해한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쉬어도 된다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공백기에 뭐 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 걱정이 앞선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첫 번째 퇴사 후엔 제주라도 떠났고 멍하니 놀다 보니 안 될 것 같아 글도 썼다. 1년을 놀다 보니 불안해서 접었던 임용 준비를 부랴부랴 다시 했고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뭐든 열심히 하면 좋은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처럼. 그러다 보니 가장 중요한 걸 놓쳤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등의 올바른 목표 설정 말이다. 쉼의 시간엔 그 고민을 해야 했다. 결국 우리가 살아낼 것은 목표 이후의 삶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이후에 천천히 해도 됐다. 목표가 세워지면 자연스레 그에 맞는 선택이 따라오기 마련이니까.
목표 없이 시간을 메우기만 했던 행동들은 결국 의미 없이 흩어졌고,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좌절했다. 결국 멈췄고, 고민 끝의 결론은 퇴사였다. 누가 보면 일을 엄청나게 오래 해서 번아웃인 온 거냐고 물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일은 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1년 일하고 쉬고, 1년 일하고 쉬고를 반복했다. 나는 누구보다 일하고 싶은 사람이다. 나도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고 싶다. 오래 함께하고픈 나와 맞는 일을 찾지 못해서 길게 일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맞는 일을 찾았지만, 경영난으로 또 한 번 실업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방향을 정비하는 시간을 맞이했다. 출판계와 디자인이라는 원하는 방향은 세웠고 상업적이면서 원하지 않는 책을 만들 것인지, 불안정해도 가치를 추구하는 원하는 책을 만들 것인지 그 갈림길 앞에 있다. 안정성을 추구했더라면 교직을 박차고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불안정해도 내가 원하는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불안정은 아니었다. 월급은 보장이 되는 직장이 상식적이니 말이다. 최소한의 상식이 통하는 그런 직장을 찾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지난번 쉼만큼 불안하지 않다. 최근에 좋은 기회로 버크만 Birkman검사를 받았다. 미국의 심리학자 버크만 박사가 발명한 개인 특성 진단 심리검사인데, 사람의 네 가지 주요 관점인 동기부여, 자기 인식, 사회적 인식,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특히 직업적인 개인의 성향을 분석적으로 알 수 있다. 나는 나를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부분 내가 예상했던 대로 나왔다. 그런 점에서 직업으로서 나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니까 불안함이 줄어들었다. 나를 알기까지 20대를 통째로 쓰면서 많이 돌아오긴 했지만 내겐 꼭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직업에 대한 어떤 로망과 궁금증이 있을 때, 나는 해볼 수 있다면 꼭 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내가 직접 현장에서 보고 느끼면서 나와 맞고 안 맞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만큼 정확한 지표가 없기 때문이다.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책 제목처럼 아직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나이니까 뭐든 도전하고 경험하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