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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의 전학,
8개 초등학교를 다닌 아들

자녀교육? 나에게 물어봐~

by 여행작가 히랑

10번의 전학, 8개 초등학교를 다닌 아들


'아이들이 전학을 하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세계적인 교육자 페스탈로치의 일갈이다.

전학 가서 새로 적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지적한 말이었다.

그건 절대 전학시키지 마! 하는 말을 격조 있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조정래 <정글만리> 중에서)


아들은 전학을 10번이나 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10번을 옮기며 8개의 학교를 다녔다. 아들은 조용하고 말이 별로 없는 성격이어서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전학이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니...... 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Office_Lens_20160429-193425.jpg (나이지리아 현지 초등학교에서 중앙에 뒤돌아 있는 학생이 두 아들, Kaduna근처, 1997)


서울에서 입학해 나이지리아 학교로

서울 1, 나이지리아 1, 간성 1(강원도), 서울 1, 간성 1, 서울 1, 화천 4.......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 6년 동안 옮겨 다닌 지역이다. 두 아들은 서울에서 초등학교 입학을 했다. 태어나서 이미 7번의 이사를 했는데 초등학교 입학은 서울에서 하게 돼서 무척 기쁘기도 하고 떨렸다. 모든 학부모가 다 느끼겠지만 자식 초등학교 입학이 가장 신경 쓰이고 선생님도 내 학창 시절 때 선생님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졌다.

아이들을 위해 '무엇이 최선일 지' 고민하다가 '내 아이만 착실하고 공부 잘하면 되지!'라며 스스로 위안도 해봤지만 마음은 늘 노심초사였다.

둘째 아들이 한 학기 마치고 남편 근무지 이동으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온 가족이 가게 되었다. 남편이 나이지리아에서 공부하게 될 군사학교는 Kaduna라는 큰 도시에서 차로 40분 들어가는 시골이었다. 한국 학교의 온갖 걱정거리를 벗어나는 건 좋은데 고민은 더 커졌다. 사는 거야 그냥 시골에 산다지만 애들 학교를 어디로 보낼 지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군사학교 내에 현지인 학교가 있고 International School은 Kaduna에 있었다. International School이 아무리 좋아도 차로 40분 거리를 매일 통학을 시키는 일은 위험하고 불가능한 일이어서 고민 끝에 가까운 현지인 학교에 보내게 되었다.

학교는 창고처럼 건물만 달랑 있고 어두침침하고 먼지 투성이었다. 나이지리아에 수많은 종족어들이 있지만 공식 언어는 영어이므로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을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두 아들을 그냥 2학년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게 했다. 학교는 오전 수업만 했고 교과 수준이 낮아 시험 보면 우리 아이들이 항상 전체 1,2등을 했다.

점심 식사 후 오후에는 집에서 한국 공부를 했다. 1주일 시간표 짜서 나는 선생님이 되고 두 아들은 학생이 되어 학교처럼 4교시 수업을 했다. 수업은 한국에서 준비해 간 과외용 교제였다. 교과 설명과 문제 풀이집이 따로 있었는데 충실히 하면 국내에서 공부한 것보다 훨씬 실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꼼꼼히 가르쳤고 아이들은 문제도 열심히 풀었다. 그때 내가 해줘야 하는 중요한 일은 가르치는 일 외에 아이들이 풀어놓은 문제들을 채점하고 틀린 부분을 설명해 주는 일이었다.

음악, 미술, 체육 시간도 편성해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나가서 체육도 했다. 아프리카 아이들이 달리기도 잘하고 축구를 잘해 그들과 함께 하는 체육을 아들들은 특히 좋아했다.

한국 수업이 끝나면 빅토리아와 영어공부를 했다. 빅토리아는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봐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아이였는데 영어 발음은 꽤 좋았다. 가르치는 스킬이 없어서 학교 교재를 무조건 읽고 아이들이 따라 하며 외우게 했다.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 저녁 7시 반에 아이들의 하루 공부가 끝이 났다.

큰 아들 생일이 크리스마스 전 날이다. 생일잔치를 열었는데 2학년 반 전체 아이들이 집에 왔다. 음료수와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주었는데 애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그런 생일잔치는 처음이라고 하며 어두워져서야 겨우 집에 돌아갔다. 그 뒤로 학교 아이들은 우리 아들과 놀고 싶어서 방과 후에 우리 집을 맴돌곤 했다.

낯설고 열악한 곳에서 아들 둘이 서로 의지하며 함께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14개월 차이로 어떻게 키우나 처음에 고민도 많이 했었는데, 그 또한 그들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시골학교가 좋지만 불편해

나이지리아에서 1년을 지낸 후 귀국해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를 한달 정도 다니다가 강원도 고성군 간성으로 가게 되었다. 두 아들은 나이지리아의 1년 교육을 인정받아 간성에서 3학년 2학기, 2학년 2학기를 시작했다. 벌써 그들의 4번째 학교였다. 간성은 동해바다가 가까운 지역으로 차 타고 조금만 벗어나면 푸른 바다가 출렁출렁하고 멀리서 설악산과 멋진 울산바위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신나게 놀았고, 주말이면 온가족이 설악산과 바다로 다니기에 바빴다. 간성은 바닷가라 그런 지 매일 휴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엄마들이 모였다. 적당한 학원이 없다고 아이들을 마냥 놀게 놔둘 수 없다고 입을 모으고 엄마 전공 별로 과외선생이 되기로 했다. 영어, 수학, 미술……. 난 영어를 맡아 회화 중심으로 가르쳤다. 5-6명의 아이들이 성격도 실력도 다양해서 소란스럽고 쉽지 않았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가르쳤다. 우리 두 아들은 나이지리아에서 1년 동안 영어로 공부하고 온 실력을 유지시키려고 집에서 열심히 가르쳤지만 영어 실력은 점점 퇴보해 갔다.

3학년 방학이 끝난 어느 날 우리 큰 아들은 방과 후 집에 오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 간성을 떠들썩하게 한 큰 사고였다. 그날부터 우리 네 식구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난 큰 아들을 간호해야 하니까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바로 서울로 데려가 집 주변 학교에 보냈다. 둘째 아들은 5번째 학교에서 6개월을 다녔고, 형이 퇴원한 후 다시 또 간성초등학교로 갔다. 같은 학교지만 6번째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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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14명 중 1명)


간성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두 아들은 4학년, 3학년을 마치고 아빠의 새로운 임지 화천군 간동면 간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산 너머 산이라고 했던가! 그 학교는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였고 큰 아들의 4번째, 작은 아들의 7번째, 8번째 학교였다. 그 지역 초등학교 상황이 너무 복잡해 설명하기도 어렵다.

화천 간동면에 3개의 초등학교가 있는데, 한 학교는 단독으로 수업을 하고 두 학교는 너무 작아 옆 학교와 같은 학년끼리 합해서 수업을 했다. 협동학교라고 하며, 한 학년의 인원수가 최소 12-13명은 되어야 한 명의 교사와 한 학급에서 공부할 수 있는데 한 학년이 6-7명밖에 되지 않아서 옆의 작은 학교와 합반을 하여 공부를 하는 것이다.

1, 2, 4, 6학년은 한 학교, 1, 3, 5학년은 또 다른 학교에서 공부했다. 우리 아들들은 연년생으로 학년이 다르니 각 각 다른 학교로 갔다. 둘째 아들은 옆 학교에서 수업받으며 2개의 학교를 다녀야 하는 어정쩡하고, 애매한 상황으로 7, 8번째의 학교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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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전체 학생들, 아들은 맨 중앙 파란 옷)


1년을 그렇게 공부하고 적응할 만하니 애들의 학교가 폐교를 했다.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아이들의 학교는 세 개의 학교 중에 단독으로 수업을 하던 다른 한 학교로 편입되었다. 두 아들은 기존에 다니던 두 학교와는 다른 낯선 학교에 6학년 및 5학년으로 갔다. 둘째 아들에게는 9번째 학교이다. 그래도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함께 가니 좀 나았다.

새로 간 학교의 큰 아들 담임 선생님은 지금까지 겪은 선생님 중에 가장 훌륭한 분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친절한 누나, 언니 같았던 선생님은 주말이면 6학년 전체 14명 아이들의 손을 잡고 들로 산으로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게 했다. 공부는 말할 것도 없고 논술이나 토론 수업도 열심히 시켰다. 학원 하나 없는 강원도 산골학교였지만 그 선생님께 받은 알찬 수업은 14명의 아이들에게 좋은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아빠가 화천읍으로 옮겨가게 되어 큰아들은 중학교 1학년, 둘째 아들은 화천초등학교, 그의 10번째 학교에서 6학년 1년을 다니고 졸업했다. 10번 중에 서울과 간성 학교에서 중복되어 8개의 초등학교를 다닌 셈이다.

“아들, 학교를 많이 옮겨 다니면서 뭐가 제일 힘들었니?”

아들이 성인이 되었는데 이제야 처음으로 물었다.

“학교 전학은 누구나 하는 줄 알았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새로운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다 좋아해 주었고 모든 게 제 위주로 돌아가서 재밌었어요. 공부는 문제가 없었는데 안 좋았던 점은 태권도 배울 때였어요. 새로운 띠를 따려고 하면 이사해서 옮겨야 하므로 다시 시작하고, 자꾸 늦춰져서 6학년에야 겨우 품띠를 땄잖아요.”

전학을 당연히 하는 걸로 알고 재밌었다니...... 그 말에 마음이 짠해지면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옮겨 다니느라 아들 들은 악기 연주 하나도 배우지 못했다. 태권도 품띠 따느라 힘들었다고 이제야 말한다. 엄마인 나도 이사와 전학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 같다. 그동안 전학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냐고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으니.

학교 환경이 자주 바뀌므로 집에서는 편안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엄마가 애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집에서 맞아 주었고 숙제와 하루에 해야 할 공부를 관리해주는 것이었다. 매일 방과 후 집에서 시간 맞춰 공부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아이들에게도 엄마에게도 적잖은 인내심을 필요했다. 큰아들은 5개, 둘째 아들은 8개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2와 중1 때 두렵고 설레는 맘으로, 언제 또 떠날지 모르는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불평불만 없이 새로운 학교 어디서나 잘 적응해준 두 아들이 고맙고 감사하다.

* 8개의 초등학교를 다닌 둘째 아들은 현재 정부출연기관 IT 연구원이고 브런치북 목차 마지막에 '뉴욕 인턴 도전기' 글을 부록으로 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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