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GV 타려다 귀한 여행을
-TGV 타려다 귀한 여행을-
파리 가는 TGV 타러 아비뇽(Avignon)에 간다. 차를 반납하기 전에 님(Nîmes)에 들러 대충 둘러보았다. 로마제국 전성기의 식민도시였고 여전히 로마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예술과 역사의 도시라더니…. 아를보다 덜 낡아 보이고 현대의 윤기가 느껴진다. 번성기에 인구가 5-6만이었고 가장 로마다운 곳이다. 시간이 많지 않아 원형경기장과 성당만 돌아본다.
1세기에 만든 원형경기장은 훼손된 곳도 없이 완벽해 보인다. 2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고 2000년이 지났는데도 현재 투우경기장으로 쓰인다. 내부도 잘 보존되어 있다는데 들어가지 못해 아쉽다.
성당을 안가면 님이 서운해 하겠지... 생 보딜르 드 님 성당(Église Saint-Baudile de Nîmes)은 잘 보존되어 있고 좀 작지만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비슷한 외관이다. 님에서 가장 중요한 곳을 가지 못했다. Pont du Gard, 1세기 로마인이 만든 수도교로 잘 보존되어 있다. 여행 중 최대 실수이다. 미리 체크해서 갈 시간을 마련했어야 했다. 프랑스 여행은 이제 안 갈 것 같은데 아쉽다.
아비뇽은 프랑스를 잘 모를 때부터 꽤 익숙한 이름이다. 역사책에서 배운 ‘아비뇽의 유수’ 때문인가? 전공과목 불어 강독에서 배운 도시라서?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때문인가? 작품의 아비뇽은 프랑스 아비뇽과 관련이 없고 사창가로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한 골목이라는데. 이유야 어떻든 아비뇽은 전에 딱히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남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차를 반납하고 파리로 돌아가기에 좋은 도시라 선택했다.
아비뇽에 도착해 호텔은 도심 외곽, TGV 기차역 근처지만 도시 한 바퀴 돌고 나오려 했다. 모두 봉쇄되고 경찰이 통제하고 있어 차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무슨 도시가 벽으로 빙 둘러싸여 있담. 타원형 모양으로 구도심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요새 형태이다. 더구나 7월에는 프랑스 대표 연극축제인 아비뇽 페스티벌이 열리므로 축제 기간이라 더욱 들어갈 수가 없다.
아침에 차를 반납하고 택시로 구도심으로 갔다. 마지막까지 렌터카로 여행하며 겪은 대략 난감한 일을 겪었다. 그 사연은 나중에 풀어내기로 하고
. 예쁜 아비뇽 거리를 걷다가 웅장한데 폐쇄적이고 아주 묵직해 보이는 건축물을 마주했다. 면적 1만 5000㎡이고 성벽 높이 50m, 벽 두께는 4m라는 교황청(Palais des Papes)이다. 현존하는 가장 큰 고딕 양식 궁전이라고 한다,
아비뇽은 14세기에 중세 로마 교황권과 프랑스 왕권 간의 분쟁이 있어 ‘아비뇽 유수(幽囚, Avignon Papacy,)’로 70여 년 동안 교황청이 있던 곳이다. 유수는 ‘잡아 가둠’이란 의미다. 한마디로 로마교황청의 교황이 아비뇽에 있었다는 얘기다.
프랑스 국왕 필립 4세는 교회 과세 문제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대립했고 교황을 굴복시키고 감금해 결국, 교황이 사망했다. 그 후(1309년) 교황부터 프랑스인으로 임명하고 1377까지 7대 교황을 아비뇽에 거주하게 했다. 지금 아비뇽에 도심을 지키고 있는 아비뇽 교황청은 1364년(4번째 교황 클레멘트 6세)에 지어졌다. 1377년 그레고리 11세 교황이 로마로 귀환하면서 아비뇽 시대는 끝난다. 그 후 교황청은 버려지다시피 하고 감옥이나 군사 시설로 이용했다.
교황청 내에서 대연회실, 기도실, 회랑, 예배실, 회의실 등 20여 개의 방을 관람할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장식이나 가구는 거의 없고 입장할 때 주는 태블릿 PC에서 3D 증강현실로 볼 수 있다. 좁은 출입구로 들어가면 방들은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고 창도 작고 별로 없다. 벽은 뜯겨 흉물스러운 곳도 있는데 다행히 예배당 같은 큰 방에는 현대 설치 미술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교황의 예배당과 침실의 벽과 천장에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생마르시알 예배당에 이탈리아 출신 화가 마테오 조바네티가 그린 프레스코화는 퇴색되어 있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당시의 타일 조각, 벽에 조각된 약간의 성상과 여기저기 당시 교황청의 미니어처 모형을 볼 수 있다. 밖에는 교황의 정원이 있다. 정원을 가꾸고 채소도 기르고 동물도 키웠다고 한다.
교황청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전망대처럼 높은데 오르는 걸 가장 좋아하는데, 아비뇽 교황청은 옥상이 백미다. 세월을 담고 있는 뾰족한 첨탑과 기와, 아비뇽 시내, 론강까지 다 보인다. 특히 첨탑과 기와가 고풍스럽고 멋져서 카메라에 담고 또 담아본다.
로마네스크 양식, 아비뇽 대성당에도 안부 인사하듯이 들른다. 천장화가 화려하다. 대성당의 돔 위에 있는 4.5톤 황금빛 성모상이 성당을 더 빛내고 있다.
대성당 옆으로 오르면 로쉐 데 돔 공원(Rocher des Doms)이 있다. 절벽 위에 만들어진 영국식 정원으로 아비뇽 시내와 론강이 내려다보인다. 론강 위에 있는 생 베내제교가 빨리 내려오라 손짓한다.
성 베네제 다리(Pont St. Bénezet)는 1177년에 아치가 22개, 길이 900m로 론강에 만들어졌다. 대홍수로 붕괴되고 현재는 아치 3개와 예배당만 남아있다.
중세에 그 큰 강에 돌로 된 다리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놀랍고 궁금하다. 성 베네제 다리에는 노르망디 지역,몽 생 미셸처럼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베네제(Bénezet)라는 목동이 아비뇽에 다리를 만들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1177년 산에서 내려왔다.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베네제는 천사의 도움으로 장정 30명도 들기 힘든 돌을 들어 옮겼다고 한다. 그 후 서로 도와 다리를 만들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가는 순례자에게 엄청나게 유용한 다리였다. 다리에 성인을 기리기 위한 성 니콜라 예배당도 있으며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라는 프랑스 민요도 있다.
로쉐 데 돔 공원에서 내려와 성 베네제 다리와 성 니콜라 예배당까지 가본다. 끊어진 다리 위에서 넓고 물이 풍부한 론강의 강바람을 맞을 수 있다. 입장료는 교황청, 정원과 성베네제(Saint Benezet) 다리까지 포함해서 패키지로 구입하면 된다. 돌아갈 때 다시 올라가야 하나 걱정했는데 시내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예쁜 카페와 식당이 유혹한다. 붐비는 곳에서 오래 기다릴 수 없어 한가한 그곳에서 식사했는데 좀 실망스러운 맛이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TGV 역으로 갔다. 아비뇽에서 파리까지 2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긴 여행에 지쳐 아비뇽에 대해 미리 공부도 못하고 Paris 가는 길에 아비뇽에 머물렀는데 TGV 시간이 늦은 오후인 덕분에 귀하고 알찬 여행을 했다.
남프랑스는 꿈에 그리던, 건강할 때 꼭 가봐야 하는 여행지다. 프랑스는 도시들은 어쩜 다 다른 특성이 있을까. 화가와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준 곳으로 의미 있는 도시들이다. 니스는 화려하고, 생 폴 드방스는 고풍스럽고, 엑상프로방스와 님은 고상하고, 아를은 왠지 울적하고, 아비뇽은 놀라운 곳이다. 남프랑스는 가는 곳마다 늘 기대 이상인 게 놀랍고 너무 좋다. 아비뇽을 떠나며 남프랑스 여행을 마친다. 세계는 넓고 갈 곳이 많아 내 평생 다시 안 갈 거라 생각하는데... 인생은 모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