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sun Leymet Apr 03. 2021

트리 히스토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리. (Photo by Misun Leymet)

    어릴 적에는 성당에 다녔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덕분에 많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플라스틱 트리와, 반짝이는 전구 그리고 몇 가지 장식을 샀다. 트리의 키가 약 70 센티미터 정도 되었던 것 같다. 거실 소파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반짝 거리는 트리가 너무 예뻤다. 왠지 전구는 어른들만 사야 하는 물건 같아서 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부모님이 퇴근하시길 기다렸다. 어린애가 묻지도 않고 전구를 샀다며 꾸중을 들을까 조금 걱정이 됐고, 아니면 반대로, 너무 예쁘다고 해 주실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했다. 퇴근하신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 아빠의 눈에는 반짝거리는 트리가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며칠 후, 밖이 캄캄한 시간에 집에 있는데, 누가 초인종을 눌렀다. 나가보니 빨간 옷에 하얀 수염이 붙은 산타였다. 얼굴을 보니 성당에 다니시는, 부모님의 지인이셨다. 수염을 어설프게 붙인 산타는 선물을 나눠 주고 다니시는 중이었다. 산타 할아버지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산타인 척을 해주길 바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허 허 허 호탕하고 유쾌한 산타할아버지의 웃음소리 대신 들리는 목소리가 왠지 나는 서글펐다. 아주머니는 평소 내가 알던 목소리 그대로 화장실이 급하시다며 어디냐고 물으셨다.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 있다고 믿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면서도 내심 서운했다. 즐거웠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그저 그런 날로 변해갔다.






    이후, 처음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다시 만들기 시작한 건, 두가 태어나고서 두 번째 해부터이다. 솔향 가득 풍기는 나무 트리를 사고 싶었지만, 왠지 한 번 사면 평생을 꺼내 쓸 플라스틱 트리가 친환경적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나고 보니 평생을 걸 물건은 아니었다.


    트리를 덩그러니 거실 한쪽에 놓아두었다. 나는 새로운 물건이 집에 들어오면 우선은 덩그러니 놓아둔다. 아이가 그걸 가지고 어쩌나 며칠 동안 지켜본다. 아이에게 고민할 시간을 준다. 그림으로 꽉 채워진 종이는 그저 바라만 보게 될 뿐이지만, 하얀 백지는 그림을 그리던, 글씨를 쓰던, 무엇을 하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트리를 덩그러니 놓아두었다. 그때의 사진을 보면, 우리의 배경 뒤로 맨둥맨둥한 트리가 멀뚱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서있다. 장식하지 않아도 집에 트리가 있는 것만으로 두에게는 충분해 보였다. 놀다가 찾은 털실이 올라가 있기도 했고, 모자가 걸쳐 있기도 했다. 밖에 나가서 트리에 무언가 올려져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아이는 이것도 올려보고 저것도 올려보면서 스스로에게 박수를 쳤다.


    처음에 아이가 종이에 선을 긋기 시작했을 때, 볼펜보다는 연필을 쥐어줬었다. 형광팬보다는 크레파스나 색연필을 먼저 사용하도록 했다. 거리에는 예쁜 트리 구슬이 많았지만, 아이가 그것들보다 조금 덜 가공된 듯한 무엇인가를 먼저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평소에 잘 가지고 노는 장난감 통을 옆에 놓고 하나씩 함께 달았다.  반짝이는 줄 장식 대신 선물 포장 줄이나 운동화 끈을 걸었다. 수많은 멋진 트리를 봤지만,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트리는 이 날 만들어졌던 것 같다. 두의 손떼가 묻었다. 두가 매일마다 가지고 놀던 인형 친구들로 만들어진 트리에는 아이가 지어낸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두가 자신의 장난감과 소품으로 장식한 생애 첫 트리. (Photo by Misun Leymet)






    이듬해 크리스마스 때에도 나는 트리를 덩그러니 거실 아무 곳에 놔두었다. 아이들은 트리 둘 곳을 저희들끼리 정했고, 양말이며, 산타 모자, 줄이 달린 벙어리장갑 같은 것들을 걸었다. 목도리로 줄 장식을 했다. 보기는 우스꽝스러웠지만, 아이들은 매일마다 변화무쌍하게 트리를 변신시켰다. 아이들과 인형 만들기를 하려고 사다 두었던 커다란 솜 가방을 꺼내 줬다. 트리가 양털처럼 부풀어 있었고, 아이들도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아이들은 옷 구석구석에 솜뭉치를 넣어서 몸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서툴지만 두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 끝이 무엇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여물어 갔다. 두가 크레쉬에서 트리에 장식할 구슬을 하나 만들어 왔다. 두에게 구슬은 트리와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짝이 되었다. 트리 장식 구슬을 여러 개 더 만들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늬가 예쁘지만 낡아서 입지 못하던 잠옷을 조각내서, 안에 솜을 넣고 동그랗게 만들었다. 작아진 두의 양말에 솜을 넣고 두 번, 세 번 묶으면 애벌레처럼 모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이들과 만든 트리는 볼품은 없었지만 아이들의 손길이 닿은 것만큼 근사한 것이 또 없다. 알록달록한 부직포를 오리고 꿰매어서 크리스마스 양말도 만들었다. 아이들은 양말을 침대 맡에도 걸어보고 트리에도 걸어보았다. 어디에 놓아야 산타 할아버지의 눈에 잘 띌까?




왼쪽부터, 냉장고 위에 두가 그린 크리스마스트리. 반짝이 도화지로 두와 덩이가 각각 만든 트리. 두가 바느질해서 만든 트리와 두. (Photo by Misun Leymet)



    올 해에는 상점에서 파는 구슬을 한번 사보자. 그동안 할머니 댁에서, 할머니가 평생 모으신 예쁜 구슬과 줄 장식으로 트리 장식을 몇 번 해 본 두의 눈에, 상점에서 파는 화려한 소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장식 소품을 풍성하게 사다가 아주 근사한 트리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소소함의 기쁨을 선물하고 싶었다. 모두 걸어봐야 빈틈만 보이는 색깔 없는 투명 구슬과 호두만 한 싸구려 빨간 구슬을 고작 몇 개 샀다. 투명 구슬은 반으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그 안에 아이들은 그림을 그려서 넣었다. 꽃 줄 장식은 세 개 밖에 없었지만, 아이들 눈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트리는 여느 보통 트리의 모습을 조금 갖춰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그 안에 자기들만의 터치가 어우러지도록 하는 데 능숙해지고 있었다.



덩이와 두가 각각 만든 크리스마스 장식. 글루건으로 붙인 마른 꽃장식이 제번 그럴싸하다. (Photo by Misun Leymet)






    코비드 19 팬더믹은 겨울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만 바라보고 사는 프랑스인들은 예전과 같이 가족들과 함께 푸짐한 명절을 쇨 수 없었다. 정부는 크리스마스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써지만, 서로 모일 수 있는 인원수에 제한을 두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시댁을 가느냐 마느냐, 갈 수 있느냐 없느냐부터가 고민이었다. 아이들의 크리스마스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돌고 세상이 조금 암울하게 변했어도, 세상은 여전히 다름없이 돌고 돌아간다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할머니 댁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올해는 특별히 나무 트리를 장만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면 할머니 댁에서 은은하게 풍기던 트리의 솔향으로, 온 가족들과 함께 즐거웠던 추억의 향수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올해는 과소비를 해 보자며 트리 장식을 꽤 많이 주워 담았다. 나는 하얀색 위주로 세련되게 장식하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것들을 좋아했다. 트리를 약간 높은 곳에 올려놓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바닥에 내려놓고 싶어 했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린 것과는 전혀 다른 트리가 완성되었지만,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트리 앞에서 '우와, 우와' 소리를 남발하며 감탄했다.



아이들이 장식한 트리와 곧 아이들이 발견하게 될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 (Photo by Misun Leymet)



    위의 사진 속에 잔이 하나 보인다. 우리 집은 코코아와 작은 초콜릿 한두 개를 마련하는데, 커피를 타 놓는 집도 있다. 밤새 추위에 떨며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며 다니실 산타 할아버지를 위해 아이들이 준비해 놓은 따뜻한 음료이다.


    시댁에서는 메인 요리가 끝나고 디저트를 먹기 전에 선물을 연다. 그리고 디저트 타임을 갖는다. 이야기 책에서 산타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잠든 사이 다녀간다고 하지만, 선물을 받고 신이 난 손주들의 얼굴이 빨리 보고 싶은 시어머니는 선물을 일찍 풀러 보게 하신다.


    식사를 급히 마치고 폴 삼촌이 사라진다. 폴 삼촌은 시어머니가 마련해 놓으신 산타복으로 갈아 입고, 배에 쿠션을 넣는다. 커다란 수염으로 얼굴을 반 이상 가린다. 쿠션이 들어가서 커다라진 빨간 자루를 어깨에 이고 아이들 몰래 정원으로 나간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며 아이들을 창가로 유인한다. 어둑어둑한 창 너머로 빨간색 산타가 지나간다. 야속하게도 산타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두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켜졌다. 덩이는 낯선 존재가 무서워서 내 품에 파고든다. 그 사이 누군가가 벽난로로 얼른 달려간다. 아이들과 함께 준비해 놓은 코코아를 비운다. 까먹고 남겨진 척 초콜릿 껍데기를 아무렇게나 둔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두는 창문에 창문을 옮겨가며 산타할아버지를 쫓는다. 폴 삼촌은 창문 너머로 아이의 환호를 들으면서도 능청스럽다. 두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나가보자고 한다. 아이를 급하게 벽난로 쪽으로 유인한다. 비워진 코코아 잔과 초콜릿 껍질 잔해를 본 아이는 실망한다. 산타를 직접 볼 수 있었는데, 한 발 늦었다. 위층으로 냅다 달려 올라간다. 위층에는 트리가 있다. 트리 밑으로 온 가족의 선물이 무덤 무덤 가득 쌓여있다. 알록달록 갖가지 포장지로 싸인 선물들이, 높이 얹어 놓은 트리 발밑에서 가득하다. '금 나와라 뚝딱!', 주문을 외워서 쏟아져 나온 금은보화처럼 수없이 반짝거린다.



벽난로 옆에 산타할아버지가 드실 수 있도록 놓아둔 코코아와 초콜릿 바. 산타할아버지를 위해 두가 그린 그림이 들어있는 예쁜 선물 상자. (Photo by Misun Leymet)



    시어머니는 지금도 크리스마스는 마술 같은 날이라고 하신다. 여전히 디즈니랜드 속에서 사시는 시어머니는 크리스마스를 말씀하실 때마다 당신 속에 잠들어 있는 백설공주를 깨우신다. 그런 마술 같은 기분이란 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은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12월이면 항상 들뜬 마음이 되는 건 맞다.






    두와 덩이는 매년 12월마다, 크리스마스 달력에 난 창문을 하나씩 열어가면서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린다. 그리고 매번 스스로 장식한 트리를 감상한다. 카드를 그리고, 캐럴을 부른다. 산타할아버지를 올해에는 꼭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산타할아버지께 편지를 쓴다.


    아이들의 학교 정문에는 우체통이 네 개 있다. 각각 쓰임새가 다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그중 하나가 산타할아버지께 보낼 편지를 수거하는 우체통으로 변해 있었다. 글을 쓸 줄 아는 두는 며칠 동안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더니 편지를 하나 완성했다. 내용의 대부분은 갖고 싶은 물건을 나열한 목록이었다. 글을 쓰지 못하는 덩이는 갖고 싶은 장난감 네 개를 그림으로 그렸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었고, 아이들은 며칠 후 답장을 받았다. 아이들의 편지를 잘 받았으며, 크리스마스의 요정들이 아이들의 장난감을 만드는데 매우 분주하다고 쓰여 있었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때까지 말썽 피우지 말기를 당부하며 편지는 마무리된다.



산타할아버지께 받은 편지. (Photo by Misun Leymet)


이전 12화 크리스마스 달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