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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굽는 건축가 Nov 01. 2021

피망과 고추의 겨울나기

2019년 11월 1일

<피망과 고추의 겨울나기>

지름 30cm 빈 화분에 피망 두 그루, 고추 한 그루를 밭에서 옮겨 심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온실에서 기르면 고추와 피망을 겨울에도 수확할 수 있을까?˝
대파랑 쪽파는 겨울재배를 해봤는데, 고추랑 피망은 처음입니다.
올봄에 씨앗을 발아시켜, 기른 파란 피망은 식탁 위에서 밥반찬으로 충분했습니다.

겨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시골 살림인지라, 잠깐 하는 사이에 겨울이 찾아와 버립니다. 된서리를 맞으면 채소들을 먹을 수 없어요.

농자재 판매상에 들려, 비닐하우스 재료도 사 오고, 수확을 마친 텃밭 자리는 낫과 가래로 철 지난 작물을 베어내고 새 땅을 만들고 있습니다.

두어 달 전에 노지에 심은 배추와 파는 영 시원치 않네요. 
대파라고 해서 사 왔는데 틀림없이 쪽파인 것 같습니다. 
˝사장님 대파 10포기 주세요˝
˝작을 때는 쪽파고, 크면 대파가 되는 거야 따로 없어˝
˝아 그래요? 그럼 이게 대파가 되는 것이네요˝
˝그래 가져가서 잘 길러˝
그렇게 10포기 사온 대파는 옆집 대파가 한 뼘 더 올라가는 동안, 이렇다 할 변화를 보여주지 않고 있어요. 
배추는 상에 올라가기도 전에, 벌레들이 모두 먹어치우는 바람에 이제야 모양을 갖추어 갑니다. 

아내는 ˝조금 더 자라면 배춧국 해 먹으면 되지 뭘 그래˝라고 하지만 이웃집 배추를 보고 있자면, 벌레들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우리 집 텃밭에는 농약을 하거나 제초제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주변에서 ˝약도 하고 그래야 작물이 좀 된다˝고 해도, 약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약 안치는 일도 일종의 자부심인지  ‘벌레가 사는 유기농 텃밭‘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피망 크기도 반쪽, 고추 크기도 반쪽 이상 크는 게 없답니다. 마트에서 사는 물건에 비하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절기 상으로는 찬이슬이 맺히는 한로 (寒 露)와 밤 기온이 뚝 떨어지고, 첫얼음도 언다는 상강(霜降)도 지났습니다. 이제 겨울의 시작이라는 입동을 일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벌레들도 모두 땅속으로 들어가는 때라고 하는데, 벌레도 보이고, 서리는 내리지 않고, 연일 따스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겁이 좀 납니다. 언제 싸한 찬바람이 곁에 서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서리가 늦어지는 덕분에, 텃밭에는 흙 토마토와 고추, 피망, 가지가 아직 달려 있습니다. 

건축가로 살다 보면 날씨에 좀 예민합니다. 
공사 시작 시점을 조율할 때, 제일 염려되는 것이 여름과 겨울 날씨입니다. 여름에는 30도를 넘어가는 날씨가 이어지고, 장마와 태풍으로 인해 예정된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겨울엔 영하로 내려가면서 땅이 얼고, 물이 필요한 작업들은 미루거나 별도의 보완을 해야 하기에 공사에 어려움이 따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현장 식구들은 늘 일기예보를 보면서 한 두 주일 후의 일정들을 준비합니다. 가끔 점쟁이처럼 날씨를 예견하기도 합니다.

친구네 집에는 개나리가 피었다고 연락이 왔어요. 지난봄에 토종 흰 민들레를 채종해 두었다고, 가져가라고 하는 지리산 친구입니다. 양지바른 산비탈에 자리를 튼 개나리 군락에 노란 꽃이 피었답니다. 한 번 꽃이 핀 자리에는 새 꽃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번 날씨가 수상하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우체통 아래에, 모과향을 품은 열매가 달리는 명자나무에도 빨간 꽃이 몇 송이 피었습니다. 명자나무는 보춘화(報春花), 산당화(山當花), 아가씨 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네요. 꽃을 보고 있으면 꽃 이름이 그렇게 붙은 이유도 나름 상상이 갑니다. 

<우리는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의 목록에서 한 개를 마치면 다른 항목으로 달려가면서 좀 더 빨리 그 일들을 해치우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이런 분주한 생활에는 대가가 따른다. 바쁘게 살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깊이 있게 뭔가를 경험할 수는 없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창조성의 주요 원천인 감각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다._ 프랜소린의 정원 통신 중에서>

시골살이는 날씨 감각이 살아나게 하죠. 우리 집 가을색은 벼를 벤 노란 냄새로 가득합니다. 집 근처 논에서 탈곡기 소리가 들리고 있어요. 24절기가 적힌 달력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이제 곧 추워질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망과 고추의 겨울나기는 어찌 될지 궁금하네요. 몇 번은 더 따먹을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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