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기다려야지
(2019년 12월 14일)
새벽시간 뒷마당에 나와보니 비가 온 후 달이 환하게 떠 있더군요
아직도 늦가을 같은 이 계절이 제 계절 답지 않기는 해도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따뜻한 날이라 공사하는데 문제가 없겠구나”
한겨울 초입에 시작한 고촌리와 성사동 세 가족 주택의 구조는 콘크리트입니다. 겨울철 콘크리트 공사는 일일 평균 4도 이상의 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4도 이하로 내려가면 별도의 관리가 더 필요하게 됩니다. 그리한다 해도 한밤중부터 해가 뜨는 시간까지는 열을 주입하는 송풍기를 가동하여 콘크리트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4도 이하로 내려가면 물을 사용하는 공사들은 영향을 받습니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타일은 접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들뜨게 되고, 도배는 풀이 얼었다 녹으면서 접착력이 떨어집니다. 콘크리트 공사는 구조적인 하자로 이어질 만큼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게 됩니다. 한겨울 공사는 관리비용도 늘어나고 현장 식구들의 잠자리도 설치게 하는 일이라 늘 염려가 깔려 있습니다.
추운 계절을 피하려고, 설계를 마무리하고, 공사비 협의를 마치고, 행정관청 허가까지 부지런하게 준비를 했음에도, 12월이 넘어가면서 신경 쓸 일이 많았는데 겨울 한파가 준비운동을 하느라 뜸을 들이고 있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니 날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허소장 이번 주에도 날씨가 괜찮네요. 다음 일정들도 무리 없겠지요?”
“네 하늘이 도와주고 있어요. 다음 주까지는 어려움이 없겠습니다.”
“그래요 밥 챙겨 먹고요. 다음 주 월요일에 김포 들어가면서 설계자들과 성사동에도 다녀가도록 할게요. 밥 같이 먹어요.”
한 해를 보름 남긴 지금, 마음 쓰던 일들도 하나씩 정리되고 있습니다. 집을 짓는 일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점검을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법이 우선입니다.
오늘 아침 1928년생 히데코(아내)의 신혼시절, 맛없는 밥을 불평 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1925년생 슈이치(남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상황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공감이 되는 글입니다.
<“18살 때까지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음식의 맛이 내 혀의 기본이 된 것 같아요. 어릴 때 먹은 음식의 기억이란 잊을 수 없는 것이랍니다” 결혼 초기부터 슈이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만든 요리라면 무엇이든 맛있게 먹어주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맛있진 않았을 거예요. 나도 ‘맛이 참 없다’고 생각하면서 먹었으니까. 하지만 남편은 불평 한마디 없이 먹어주었어요. 참 고맙게 생각해요” 히데코와 슈이치의 ‘밭일 1시간, 낮잠 2시간’ 중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모두가 저의 선배이고 스승이었는데 어느 때부터는 동료들과 일을 하고, 시간이 지나더니 제가 선배가 되어 있습니다. 오랜동안 건축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분야도 있고,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건이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할 때가 있고, 모르면 무엇을 모르는 것인지 찾아가는 과정이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들 간의 의견이 맞지 않고 서로의 기준과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성격과 일의 색깔이 다른 데서 오는 불협화음도 자주 드러나는 곳이 건축세계입니다. 그렇지 않은 분야가 없겠지만 건축도 그렇습니다. 다만 의뢰인들 앞에서는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지요. 그런데 실은 가끔 건축주들 앞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솔직히 인정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해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고촌리 현장과 성사동 세 가족 현장이 그렇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공사를 시작하면서 기초공사의 방식을 두고 설계자와 시공자, 공사관리를 하는 모두의 입장에 차이가 있어서 차이를 좁히는 과정을 고스란히 건축주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다만 일이 될 수 있도록, 건축물에 가장 좋은 경우의 수가 무엇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할 수 있었기에 공사를 무난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건축을 의뢰받고 현장을 살피고, 관계자들이 모여 설계 협의를 하고, 그 땅과 건축주에게 어울리는 건물을 만들어 낸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공사를 시작하면서는 아쉬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슈이치 할아버지가 히데코 할머니의 밥을 맛있게 먹는 풍경처럼 1:1로 지어지는 건축물이 들려줍니다. “도면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소, 1:1로 만들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다 안다고 하지도 말고, 모른다고 하지도 마소, 살면서 보이는 것이 진짜 보이는 것이니, 튼튼하고 야무지게 땅을 딛고 설 수 있도록만 하소”
현장 식구들과도 가족들과도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맞추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겨울에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감사히 비를 맞이하게 되네요. 요사이 우리 집 감나무에는 새떼들이 몰려와 감을 다 먹고 있습니다.
깜선생(고양이)은 온실에서 새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고요.
아내에게 “강남 갔던 제비가 박씨를 물어온 것처럼, 새떼들이 감을 다 먹은 대가로 박 씨를 물어다 줄 거야”라는 저의 표현에 아내는 그냥 웃기만 합니다.
감나무 높은 곳에서 감을 먹고 있는 새들을 보면서 깜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저 녀석들이 땅으로 내려오는 때를 기다려야지, 바닥에 떨어진 감도 있으니 나무에 달린 감을 다 먹으면 내려올 거야. 때를 기다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