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 받는 기술을 습득하는 마을살이

발효빵과 호박죽

by 빵굽는 건축가

(2019년 12월 9일에)


“7호 이모네 빵 가져다주고 올래?”

“응 어떤 것으로 줄까?”

“가져다주고 싶은 것으로 드려, 두 개 다 이쁘잖아”


휴일 아침에 구운 빵을 옆집 이모네 가져다 드리라고 딸아이에게 부탁합니다. 제가 들고 가서 구운 빵 자랑도 하고, 커피도 한 잔 마실 핑계를 찾고 싶었지만 어린이가 가면 새로운 관계와 경험들이 쌓이는 것을 알고 있으니, 딸아이에게 들려 보냅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닭을 길렀습니다. 여덟 마리까지 길렀으니 기업농은 아니지만 매일 낳고 쌓이는 알을 어찌하지 못해 한 두 개씩 이웃집에 가져다주고, 손님들이 오시면 인심 후하게 알을 나눌 수 있었지요. 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토종닭의 알을 받아가는 지인들의 표정은 다양했어요.

“다음에 또 줄 거지요?”하는 분들도 계셨고,

“어쩜 닭을 기를 생각을 해”라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남는 것을 나누는 것이니까 이럴 때 인심 쓰는 거죠. 맛있게 드세요.” 돈으로 치자면 얼마 되지 않는 깨알 같은 일이라도 나누는 씀씀이는 오고 가게 됩니다.


이웃들에게 알을 배송하는 일은 역시 딸아이의 몫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몇 차례 하다 보니 옆집들과 딸아이 사이에 '일종의 거래?' 같은 것이 발생하더군요. 거래라고는 해도 돈이 오가는 것은 아니고 무엇을 가져다주면 그것도 막 낳은 따뜻한 닭알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면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쌓이는 그런 ‘정이 가는 거래’라고 하면 좋겠네요. 그 가운데 7호 누님과 딸아이는 100일간 계란을 가져다 주기로 협약을 맺은 적도 있습니다. “알을 100일간 가져다주는 거예요” 지난 일이지만 우리 집 닭들이 난 알을 가져다준 기억들은 지금까지도 달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받은 것이 있으니 자연스레 주고 싶은 것들이 생기는데, 단순히 물건을 주고받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마음도 따라옵니다. 돈이 오가는 것에서 생기는 채무와는 다른 빛깔의 기억을 주고받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제는 딸아이가 빵을 배달하고, 호박죽을 한 단지 받아왔습니다. 잘생긴 옹기 뚜껑이 있는 그릇에 호박, 팥, 으깬 고구마와 땅콩이 들어있는 노랗게 따끈한 죽그릇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온 딸아이는 “아빠 이모가 오늘 아침에 하셨데. 맛있겠다.”

뚜껑을 여니 호박죽에 빨간 팥이 들어있습니다. 추운 겨울날 호박죽은 속에 부담도 없고 뜨끈한 게 마음까지 덥히는 효과가 있네요. 집에서도 가끔 해 먹는 편인데 이웃집에서 배달이 올 때는 그 집만의 맛이 배어있어 매력이 있습니다. 맛과 요리도 전염이 되는 바이러스 같은 속성이 있나 봅니다. 일주일 전에 제가 늙은 호박으로 죽을 쑤었는데 이번 주에는 옆집에서 호박죽을 하네요.


이웃집에서 떡을 하면 “가래떡을 좀 했으니 그릇들 가져오세요”라고 마을 톡방에 공지가 올라오고, 삼삼오오 그릇이나 접시를 가지고 그 집에 몰려갑니다. 떡을 받으면서는 웃음도 커지고 하지 않을 실없는 소리도 하고, 덕담도 주고받습니다. "하하하 떡이 실하네, 쌀이 남아도나 봐요, 떡을 다하고, 역시 부자는 달라. 맛있다. 복 받을 거예요" 이런 우수개소리들입니다. 동네에 살다 보면 음식 만드는 솜씨가 잘 쓰이기도 하지만, 음식 솜씨가 아니어도 주고받는 기술들이 하나씩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커피를 나누거나, 빵을 사 와서 같이 먹고, 번역을 하시는 0호 형님은 새로 번역한 책이 나오면 책을 나누어 줍니다. 스스로에게 맞는 은근한 균형을 맞추어 가며 살게 됩니다. 무엇을 받으면 마음속에는 그것이 깊게 자리 잡나 봅니다. 좋은 일이겠지요?


빵과 호박죽을 나누는 일만 보자면 단순한 물물교환 같습니다. 의도한 것이 없으니 편안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이 동네의 물물교환은 부담스럽지 않아 제법 괜찮습니다. 머릿속으로 계산해서 ‘이것이 가면 저것이 와야만 해’라는 것도 없고 생활 속에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고받는 일상이 고맙고 그렇습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귀중하고 값진 것을 보물이라고 하여 애지중지 소중하게 여긴다면, 밥 한 그릇, 따뜻하게 웃음 섞인 한마디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들 생활을 알뜰하고 값지게 다듬는 일이겠지요. 눈에 보이는 보물과 마음속 보물이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조화를 이루면 더 좋겠네요.


집 앞 동편 퇴비장 옆에 있는 8년 차 모과나무에서 익은 모과를 이웃들과 나누어야 하는데 망설이다 말았습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스무 개 남짓 열린 모과 열매는 약을 안 하다 보니 벌레를 많이 먹어 속이 성한 것이 없습니다. 멀쩡하고 색은 좋은데 잘라보면 반이상 벌레를 먹었으니 이웃에게 나누기가 그렇습니다. 그제는 현미식초를 세병 사서 그중에 한 병은 모과식초를 담았습니다. 모과를 씻고 말린 후 부엌칼로 잘라보니 멀쩡한 구석이 얼마 되지 않아 식초를 다 쓰지 못하고 한 병만 사용하게 되었네요.


나머지 두병으로는 무엇을 할지 생각 중입니다. 모과가 주렁주렁 달려서 동네 사람들이 은근히 기대를 할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가기도 그렇고, 아무래도 올해는 벌레 먹은 모과를 나누기 어렵겠다고 마을 톡에 공지는 하려고 합니다. 작년처럼 모과 나누기를 기대하고 있을 수도 있거든요. 모과식초를 먹어본 적은 없어도 지난해까지 설탕을 가득 넣어 만들던 모과청 대신에 식초가 몸에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올해는 모과식초를 담게 되었습니다. 어떤 맛일지 궁금해집니다.


자르지 않고 남은 모과는 넓은 선반에 담아 노릇하게 푸른 모과향이 올라오도록 온실 한편에 놓아두었습니다. 올해는 모과 벌레들도 온실 속 모과 안에서 따뜻한 겨울을 나겠지요.


pimg_7184471112379834.jpg 발효빵이 가고 누님네 호박죽이 한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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