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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Sep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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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화적 시효



거대 쇼핑몰 1층에서 그 건물 중간층에 있을 카페 이름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4층으로 올라갔더니 그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진짜 만나네요.”


우리는 이전처럼 서로 존대를 하면서 악수를 주고받았다. 그의 얼굴은 청년기의 예리함을 잃고 동네 세탁소 아저씨 같은 표정을 띠었지만 몸 전체를 아우르는 기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WK는 건너편 의자를 가리키면서 자신의 연락처 정보가 담긴 명함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용재. 소율문화재단 대표이사. 일단은 안도감이 흘러나왔다. 설마 보험외판원은 아니겠지? 옛 동지들을 두고 감히 그와 같은 의구심은 가져 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명백한 거짓말이 될 것이다. 이십 대 당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이 보험외판원으로 변신하여 나의 생활 속으로 쳐들어오는 일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거절이라는 의사표현이 잘 먹히지 않고 에러를 낼 때마다 내 몸이 거대 프레스에 눌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 문화재단 대표이사는 너무 고마운 감읍의 글자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WK가 WK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판으로 가지 않았다는 신선함은 귀해 보였고, 그중에서도 문화라는 공통점이 새로이 발견된 참이라 내 안에서는 반가운 감정마저 일어났다. 문화계 인사라면 시효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수십 년 전 일에 대해 사과든 변명이든 즐겁게 주고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와 같은 쓸모없는 어리석음이야말로 문화가 하는 일이라는 너그러움이 내 안의 완고했던 빗장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럼 혹시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

  

아니면 일부의 중년 직장인들처럼 집은 서울이고 직장은 지방인가.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나의 톤이 조금 높아졌다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든 말끝을 내릴 수 있다는 사인마저 보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아주 불편한 시간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포르투갈이나 세네갈 같은 곳을 여행하다가 고향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 사는 집은 이 근처.” 그가 차분한 음성으로 도리질을 했다. 상근직은 아니라는 말에 명함을 다시 들여다보았더니 소율문화재단 대표이사라는 직책 말고도 미술애호가라는 흥미로운 단어가 덧붙여져 있었다. 소율은 인천 지역의 작은 소읍이고 한 달에 두어 번 내려가 회의에 참석하면 된다고 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냥 형식적인 직책이라고 겸손을 떨기도 했다. 그때 내 입에서는 그러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는 실례의 질문이 튀어나오고 말았는데 그는 입시학원 강사를 병행하고 있어 수입은 괜찮다고 했다. 아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순서가 끝났으니 이제는 내 차례인 것 같았다. 나는 명함이 없다는 변명과 함께 프리랜서라고 나를 소개했다. 유명한 작가도 아니고 책을 많이 내지도 않아 어디 가서 소설가라고 하기에는 객쩍은 바가 없지 않았으므로 아주 빗나간 자기소개는 아니었다. 또 소설가라고 하는 것보다 프리랜서라고 하면 어느 정도 질문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었다. 아, 그러시구나. 그와 같은 짧은 반응이 뒤따르는 것으로 자기소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반박이라도 하듯이 오른손을 내저었다.  

  

“유명한 작가면서. 나, 책도 읽어 봤는데.” 그가 말했다. 

  

“어? 그럴 수가 있나.”

  

활달했던 내 말투가 순식간에 움츠러들었고 나도 모르게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었다. 아이가 보던 책이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둘 다 딸이고 큰아이는 미국 유학 중이며 둘째 아이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중이라고 할 때는 은근한 자랑과 자부심을 내비쳤다. 잠시 후에는 아내와는 이혼 상태라는 개인 신상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지난주 나와 동행이었던 그 어른이 누구였는지 물었다. 모친이나 시어머니 같지는 않았는데···. 그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나는 내가 돌싱이라는 상태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지난주 그분은 은사님이었다는 간략한 정보만 언급하고 슬그머니 이야기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그는 소설가라는 화제를 다시 꺼냈고 “그 책 제목이 뭐였더라?” 하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등단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동안 내가 출간한 책이라고 해 봐야 청소년소설 세 권과 몇 개의 단편소설이 전부였다. 거의 십 년에 한 권꼴로 낸 책이니 어디 가서 소설가라고 하면 허위사실 유포가 되는 게 아닌지 우려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세 권의 청소년소설 중에서 한 권을 읽어 보았다고 하니 나는 정말이냐고 되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딸내미가 읽던 책을 우연히 손에 잡았다가 프로필 사진을 보았는데···. 누군지 딱 알겠더라고.”

  

자신이 알던 사람이 소설가여서 참 신기했다는 말과 함께 뜻밖의 고백이 이어졌다. 지난주 그 건물 에스컬레이터에서 말을 걸기 십여 분 전부터 긴가민가하면서 나를 지켜보다가 무작정 에스컬레이터에 따라서 탔고, 내가 부축하던 분이 “지선아, 오늘은 회 먹지 말자.”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확신이 들어 말을 걸었다는 것이었다. 조금 말문이 막혔으나 속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대책 없이 오지랖을 펼칠 때가 있었다. 나는 재빨리 미술애호가라는 알 듯 말 듯한 그의 관심사를 건드려 보았다. 오래 끌 만한 화젯거리는 아니었지만 평소 나에게는 미술에 관해 아는 척하고 싶은 게 없지는 않았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서양미술과 관련된 수업을 꽤 많이 들었고 청강을 한 것도 두어 과목 이상이었다. 전남편의 영향이 컸다. 이혼을 했으므로 이제는 나의 소장품은 아니게 되었지만 한때는 내가 살던 집 거실에 유명작가의 작품을 걸어놓았던 적이 있었으므로 문학만큼이나 미술은 지금도 내 생활과 어느 정도의 밀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국내외 이런저런 전시회 이야기가 끌려 나왔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흥미로운 뒷이야기 몇 개를 풀어놓았다. 그가 알고 지낸다는 미술계 인사 중에 나와도 친하게 지냈던 윤주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는 무척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지금 전화해 볼까요? 그가 당장 전화를 할 것처럼 휴대폰을 치켜들었을 때는 뜯어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윤주는 지금도 좋은 감정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으나 그녀가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고 재개통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확고부동해 보였던 ‘공적 임무’가 왠지 모르게 사적 영역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경계심이 발동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붙잡혀 사는 미세 관계망을 논할 바에야 차라리 건국대학교 농성사건을 화제 삼는 편이 낫지 않을까.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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