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 약속 유효하지요?
그로부터 3년 뒤인 1989년 어느 여름 집회(임수경이 방북한 시점이었다)에서 BS를 우연히 만나고서야 나는 사건의 진실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건국대학교로 모이라는 통보를 받으면서 강동여대는 배제하라는 명령이 동시에 떨어져 당시의 구성원 전체가 나를 따돌리는 데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때 너가 많이 의기소침해서······”
나와 유일하게 사담 아닌 사담(다른 집회에서 함께 경찰서로 연행되어 밤새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던 BS는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는 그 한 마디를 덧붙였을 뿐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라리 나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는 게 나았을 경험이었다.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WK의 얼굴을 간간이 떠올렸으나 해명을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엉뚱한 시간대가 되어서야 불현듯 만남이 성사되고 만 셈이었다.
그를 만나야 할 이유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 같았으나 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묵은 것은 사람을 평생 따라다니면서 마음을 옥죄고 정신을 괴롭히지만, 또 어떤 것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마모되고 파편화되어 별다른 상흔을 남기지 않은 채 망각되기 마련이다. 그 사건은 나에게 후자에 가까웠으며 그 시대에 진심을 얹었던 젊은이라면 사소한 것에 속하는 그런 일쯤은 가슴에 묻고 넘어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 편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도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오늘 5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 확인 문자 보냅니다. 이따가 만납시다. WK의 의사는 분명해 보였다. 그 약속 유효하지요? 라고 묻는 게 아니었다. 나는 알겠습니다, 라고 답을 보냈지만 그와의 약속에 더 나가기가 싫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문인들끼리 <사람의 말>이라는 한 줄의 문장을 모아 문집으로 엮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한 줄을 적어 넣는 과정에서 ‘나’와 내가 분리되는 경험을 하였다. 나누어진 ‘나’ 중의 일부는 당시의 운동권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음을 나는 어렴풋이 알아차렸던 것 같다. 분리된 것은 노무현과 나, ‘우리’와 나만이 아니었다. 1980년대에 알고 지냈던 친구들은 물론이고 살아 있는 어머니와도 감정적 분리를 경험하는 사건이 내 안에서 벌어졌다.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길을 가는 것이며 나는 나만의 역할을 찾아내야 한다는 자각은 노 대통령에 대한 애도를 통해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가속화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살아 내기 힘들었던 것도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이후 얼마간의 과도기를 거치는 동안 한 입으로 두말하고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말을 더듬는 나를 응시하면서도 내면에 얽혀 있던 무질서한 실타래를 분류하거나 처리하기보다 무의식 속으로 통째 밀봉해 버렸고 그것을 끌러 보는 일 없이 나이가 들고 말았다.
그런데 시효가 지난 뒤의 약속 하나가 그것을 다시 돌아보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어째야 하는 걸까. 봉인된 것을 뜯고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할 용기가 나에게 있을까. 나가기 싫다는 감정의 배면에 또 다른 기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들어 아침이 이토록 장엄하고 위대하고 스펙터클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