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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Sep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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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날달걀 추억



“8층으로 올라가 식사나 같이 할까요?”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주섬주섬 개인소지품을 챙겼다. 사실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에 백화점 오픈카페는 어울리지 않았고 그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상체를 앞으로 내밀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면 조용한 카페를 찾아 거대 쇼핑몰을 벗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 층으로 올라가면서 그가 옛날 기억 하나를 꺼냈는데 바로 연대모임 이야기여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드디어 워밍업이 끝나고 본격적인 임무 수행의 자세로 돌아가는구나 싶었다. 그가 말했다. 그해 여름쯤이었나. JK가 가져왔던 달걀바구니 생각나요? 남부지방 사투리를 심하게 쓰던 친구였잖아요. 모임에 오기 전에 서울역에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면서. 그러자 놀랍게도 손잡이가 있는 작은 대바구니와 수북이 쌓인 날달걀의 위태롭던 자태가 떠올랐다. JK는 자기네 닭이 낳은 맛있는 달걀이니 먹어 보라며 거듭 권하였으나 그 자리에서 달걀을 깨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먹지 않았을까요?”

  

“그러게요. 하하.” 

  

WK는 이빨로 톡톡 쳐서 마시는 달걀의 참맛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나는 지금도 날달걀 맛을 몰라요, 먹어 본 적도 없고요. 삶거나 프라이를 하면 얼마나 맛있는데 그걸 그냥 먹어요. 아깝게. 하지만 모임을 끝내고 자기 학교로 돌아가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그냥 생으로라도 깨 먹을걸. 그 귀한 걸 왜 양보했을까. 그때의 아쉬움 때문에 지금껏 기억나는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WK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당시의 환경에 책임을 돌리고 싶었다. 그토록 경직되었던 학생회관 지하 동아리실에서 그 날달걀 바구니는 잘못 배달된 화환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너나없이 고향을 떠나와 자취를 하는 입장이었지만 생활의 냄새가 뭔지 몰라도 될 만큼 시대의 이상에 만취해 있었다. 실제로 그 당시 나는 밥 먹는 것을 자주 잊어먹었고 물 마시는 것마저 게을리 하였다.

  

“참 순수했던 시절이었죠?”

  

음식점을 기웃거리며 그가 말했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귀하지만 죽어 버린 정서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여기가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가 앞장서 들어간 곳은 순대국밥집이었다. 아차, 싶었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직원은 재빨리 자리를 안내했고 내가 나의 의견을 피력하기도 전에 그는 순대국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눈 딱 감고 먹어 보자는 다짐으로 자리에 앉았으나 날라져 온 순대국밥 뚝배기가 펄펄 끓는 것을 보자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족이든 일 때문에 만난 사람이든 내 또래 남자들과 음식점에 들다 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국밥 종류를 선호했다. 나는 뜨거운 음식은 질색을 했으나 최근에는 내 또래들과 밥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에 방심에 빠졌던 것 같았다. 뭐 먹겠느냐고 물어보지 않는 것은 넘어갈 수 있는 성격이지만 펄펄 끓는 국밥으로 내가 먹을 음식을 통일해 버리는 것은 용서가 불가능했고 그런 작자와는 다시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음식과 관련해 양보할 수 없는 나의 편견이었다. 남들이 사 주는 국밥을 억지로 먹다 보면 뜨거워서 땀이 났고 화가 나서 욕이 나왔다. 공적인 목적을 상상하며 나왔으나 그와 나의 만남은 사적인 취향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날달걀이라는 신호의 의미를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식기 전에 드시죠. 그가 친절한 목소리로 국밥을 권하는 게 말할 수 없이 짜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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