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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Sep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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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변인 배틀



“그 친구들 중에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 있어요?”

  

하아, 하아. 그가 뜨거운 김을 기분 좋은 표정으로 내뿜으며 물었지만 나는 그 불쾌한 열기에 주눅이 들어 고개만 가로저었다. 몇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한국사회의 관계망과는 무관하게 연대모임 대표들과 나는 별다른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내가 속한 집단의 운동성향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강동여대는 건국대학교로 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의 배경을 나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다산 보임은 그냥 포장이랍니다.”

  

몇몇 대표들은 중요한 사안을 논하다가 약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지면 다산 보임이라는 비밀조직을 욕하고 빈정거렸다. 나는 강동여대가 당시의 주류 운동권과는 맥락이 다르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다산 보임이라는 이름의 하부조직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산 보임은 1970년에서부터 이어져 온 한국 내 자생적 운동조직이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산하 공연단체 속에 숨어 있는 조직이라는 점에서 포장이라고 불린다는 사실 역시 한참 뒤에나 알았다. 다산 보임 파 조직원들은 모든 대학에 분포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비주류였고 자기주장을 드러내지 않은 채 주류 운동권에 협력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나와 학교 밖에서 가끔 만나 교내 상황을 공유하던 윗선 선배는 강동여대 출신이었고 지방으로 탈춤 전수를 다니며 춤에 빠져 있었던 우리는 더도 덜도 아닌 딴따라였다. 나는 꽹과리를 지독하게 못 쳐서 공연 때마다 욕을 먹는 상쇠였다. 딴따라보다 당시를 회상할 더 중요한 정체성을 지닌 단어를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그때 만났던 연대모임 대표 서너 명이 신문기사에 실린 것은 봤죠.”

  

건국대학교 농성사건 이후 몇 개월이 흐르고 우리가 4학년 활동을 마쳤을 즈음 나는 K학생연맹이라는 조직도와 함께 서너 명의 아는 얼굴이 중앙일간지에 실린 것을 보았다. 모두 본명으로 기사가 나왔고 WK의 얼굴은 거기 없었지만 그가 K학생연맹 조직도와 무관했을 리는 없는 일이었다. 진짜 중요한 활동가라면 그는 언제나 알리바이에서 배제되기 마련이고 연행이 되더라도 구속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동부지구 대학의 주요 활동가 중 한두 명은 이후 시민운동가로 티브이나 신문에서 자주 보았는데, 그중 한 명인 이석진은 나의 대학 후배의 전남편이어서 항상 주목해 왔던 인물이기는 하나 그를 두고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고 공개하기에는 어색한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땅히 할 이야기도 없던 참이라 나는 대학 후배의 전남편이라는 정보는 숨긴 채 슬며시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유부남 시민운동가가 데이트 폭력의 주인공으로 신문에 나다니, 너무 했다고 말이다. 그러자 그는 발끈하면서 그를 변호했다. 진실은 신문에 나온 것하고는 다르며 상대 여자가 문제 많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이석진은 내가 잘 알아요.”라는 말이 서너 차례 반복되었다. 내가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로 한 사람의 행적을 평가한 것부터 옹졸한 처사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는 제삼자에 속하는 이석진의 입장을 대변하느라 진(陣)을 짜기까지 하는 행동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했던 표현이 여성이라는 집단에서 가져온 것이었다면 그는 남성 집단의 대변자가 된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오기가 치밀었던 것 같다. 나는 잠시 후 또 다른 사람 이야기로 건너뛴 나 자신을 말릴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화제에 오른 대상을 자기 등 뒤로 숨기면서 스크럼을 짰고 홀로 내팽개쳐진 나는 조용히 무안함을 곱씹어야 했다. 나는 더 이상의 반전은 도모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밥이나 먹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옛일에 대한 사과나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 뒤 어떻게 하다 보니 그가 자신의 수입이며 재산까지 거론하게 되었는데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집 정원 안쪽까지 끌려들어 간 느낌이었다. 사실 그 근처 아파트에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넉넉한 생활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형편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불만이 많았다. 입시학원 강사로 돈을 많이 벌지만 그 돈의 대부분이 아이들 과외비와 학비로 들어가는 것이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 대학 보내기 위해 벌이를 몽땅 털어 부었으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지금은 큰딸의 해외 유학비를 대느라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전처가 나서 더 큰 씀씀이를 만들어 내니 환장할 지경이라고 했다. 정 돈 들어갈 데가 없으면 큰딸의 미국 아파트를 더 좋은 곳으로 옮겨서라도 자신의 수중에 돈이 모이는 것을 막는다고 했을 때에는 왠지 그의 음성이 물속으로 잠겨 드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은 이혼 상태라고 했던 것을 잊지는 않았지만 나는 혹시 기러기 상태냐며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아니라고 했다. 그때 빙의라도 된 것처럼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특이한 말본새를 가진 남자의 일상적 공격은 피하면서도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의 출납을 계속 맡으면 안 되는 걸까요.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은 여전히 가족인 거라는 생각이 들자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존재할 수 없게 된 이유가 언어의 파생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고 보면 쇼윈도 부부의 배면에 쇼윈도 이혼이 있으면 안 된다는 법도 없었다. 입금은 되었는데 인출이 안 되는 것이 돈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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