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86년 건국대학교
그해인 1986년 늦가을에 나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건국대학교 농성사건을 겪었다. 하지만 나의 소속 대학인 강동여대 운동권 학생 그 누구도 건국대학교 집회에 참여하지 못했다. 모교에서 그 일에 대한 파장은 길게 이어졌다. 후배들은 역사적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 강동여대의 처지를 개탄스러워했으며 그 책임자인 나에게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비난은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내가 지도하고 있던 직속 후배는 그의 직속 후배들에게 욕을 먹었고 후배의 후배는 그 밑의 후배들에게 불신을 샀다. 사건의 비중을 떠나 사안의 성격은 비교적 간단했다. 건국대학교로 모이라는 연락을 받는 장소에 학교 대표였던 나는 나가지 못했고 강동여대 조직구성원들에게 오더를 전달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연대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학교를 출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모임에 한 번 빠지면 비상연락망을 가동해야 했고 휴대폰이 없었던 당시에는 복구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기에 연대모임에 빠지거나 장소를 오인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저지르지 않았던 실수가 나에 의해 발생했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나로서는 이상하고 미심쩍고 억울하기까지 하다는 감정이 없지 않았다. 나는 약속장소인 어느 대학 문리대 앞으로 시간 맞춰 나갔으나 연대모임 대표자들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 건국대학교에서 애학투련(전국 반외세 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발대식이 있었으며 현장에 경찰이 난입하는 바람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건물 안으로 도피해 농성 중이라는 사실을 티브이 뉴스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 해명이 시원치 않았으므로 학교 후배들은 계속해서 진상규명을 요구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잘못했다는 식의 사과와 자조 섞인 한숨뿐이었다. 나는 부실한 활동가인 적이 없었다는 내면의 함성이 마음을 찢어 놓아도 그것을 입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졸렬한 변명 같았고 그러한 변명이 용납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입을 다문 채 불만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어렵게 비상연락망이 가동되어 연대모임에 나갔을 때 각 학교 대표들이 나에게 건넨 첫마디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위로였다. 대부분의 학내 조직이 초토화된 상황에서 강동여대 조직이라도 무사해 다행이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세세한 내막을 차마 털어놓을 수 없어 가슴이 아렸다. 건국대학교 농성현장에서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고 수천 명이 연행되었다. 동부지구 연대모임의 또 다른 대표인 BS(여성이었다) 역시 건국대학교를 빠져나오다가 경찰서로 끌려가 집중적으로 아랫배를 걷어차였으며 이후 한 달간 멈추지 않는 하혈을 겪었다고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강동여대는 조직이라도 무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전하자니 너무 죄스럽고 민망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왜 우리 학교만 건국대학교에 없었느냐는 모교에서의 목소리는 학생운동권에서 강동여대의 위상은 무엇이냐는 추상적 질문으로 표면화되었고 이후 그것마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진통을 겪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한 학교가 명문대든 아니든 운동조직의 일원으로 3, 4학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구속을 각오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로 직결되는 고민거리였는데, 건대 농성을 겪고 나자 우리만 무사했다는 죄의식은 차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자조로 변해 갔고,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구속을 각오하면서까지 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웃기고 바보 같은 짓이라는 인식이 나타난 것이다. 진상규명 요구 뒤에 안도감이라는 깜찍한 감정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짚어 내지 못했던 나는 이후 조직을 잘 추스르거나 수습하는 데 실패했고 다음 학년의 구심점을 만들어내지도 못한 채 그해의 활동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