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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상순 Sep 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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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만남



토요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날 오후에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옛 동료를 수십 년 만에 만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달랑 전화번호 하나만 주고받았을 뿐 나는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 전화번호부에 임시로 저장된 그의 이름은 오래전에 사용했던 학교명 영어 약자인 WK였고, 그 역시 나를 내가 다녔던 대학의 영어 약자인 GD로 저장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는 1986년경 서울지역 대학생 연대모임에서 만나 안면을 익힌 사이였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일 년간 모임을 계속하는 동안 서로의 개인 신상은 물론 이렇다 할 사담을 주고받은 바가 없었다. 잘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던 우리가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뒤 강남의 거대 쇼핑몰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서로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일이 일어났다. 그날 나는 여든이 넘은 노인을 부축하고 있었기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반응했으나 그럼에도 그와 나 사이에 약속이 이루어지고 전화번호가 교환된 것은 아무래도 그의 순발력 덕분이 아닌가 한다.


“다음 주 토요일 이 시간에 여기, 아니 저기서 보는 게 어때요?  


그가 즉흥적으로 가리킨 것은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오픈형 카페였고 나는 그 카페 이름이 무엇이며 그곳이 몇 층쯤인지 정확히 떠올리지는 못했지만 그가 나를 꼭 만났으면 한다는 긴박감은 전해졌기에 부랴부랴 내 전화번호를 불러 주었다. 하지만 이후 별다른 문자 한 통 주고받은 적이 없는지라 나는 이것을 지켜야 할 약속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그것 역시 반갑다는 인사말의 일부였는지를 매우 헷갈려 하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언제 밥이나 같이 먹자며 손을 흔들고 헤어지는 것과 어느 날 몇 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이 정해지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를 잘 모르며 만나야 할 이유 같은 것은 더더욱 떠오르지 않는다며 번민하다가 어영부영 토요일 당일을 맞이한 것이었다. 

  

나가지 말까.  


전화번호가 틀리지 않는 한 문자 한 통이면 분명해질 일이었지만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내 불투명한 것을 기정사실로 만들 바에야 그냥 모르는 척 눙치는 게 나을 거라며 시간을 뭉개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는 만나야 할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만날 이유가 조금도 없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을 읽었다. 실은 상대의 이름을 모른다느니 하는 식의 넋두리는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오직 공적 임무밖에 없었던 우리 사이에서 사적인 이유를 찾아내려는 것 자체가 딴전이고 회피에 가까웠다. 그와 나 사이에는 진즉 오갔어야 하는데 미처 나누지 못한 여분의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WK뿐 아니라 당시 그 모임에 나왔던 멤버 전체를 소환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사건이 그때 있었고, 나는 대형 쇼핑몰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를 마주친 순간에도 가장 먼저 그것을 떠올렸음을 뒤늦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WK가 동부지구 모임의 핵심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전체 학생운동권의 책임자였는지에 관해 나는 아는 바가 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메이저 캠퍼스와 마이너 캠퍼스는 학력고사 점수의 차이로만 대별되는 것은 아니었고 메이저가 많은 정보와 권한을 독식했던 것은 운동권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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