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덮어쓰기
그가 바래다주겠다며 밖으로 따라 나왔다. 현재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읽어 내려고 표정을 살폈으나 알쏭달쏭했다. 전철역 쪽으로 걸어가면서 기부를 자주 하는 게 사실이냐고 물어보았다. 제 수입의 5분의 1, 아니 10분의 3가량은 그렇게 나갈 걸요. 그마저 하지 않는다면 이 한 몸 살아서 뭐 하겠어요. 나는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으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오랜 과거를 만나 마구잡이로 판단하다가 제동이 걸린 것 같았다. 비우기 위해 만났는데 보따리 하나가 더 늘어난다면 꽤나 거추장스러운 일이었다. 혹시 소율문화재단의 활동과도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부정하지 않았다. 특히 노동자들과 소외된 지역의 노약자들에게 신경을 많이 쓴다고 했다. 우리 문화재단에 관심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영화감상 모임도 있고 공부하는 팀도 있으며 심지어는 사주공부방도 있어요. 아, 그렇구나. 그러네요. 나는 엄지 척을 해 보였지만 새삼 모임 같은 것에 끼고 싶지는 않아 “나야 밥이나 겨우 먹고 살다 보니.”라며 발뺌했는데 그는 대뜸 “혹시 반찬값은 제가 대도 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제 반찬값을요? 왜요?”라며 소스라쳤고, “아, 아니. 밥은 먹고 살아요.”라고 수습한 뒤 양손을 휘저어댔다. 헤어질 타이밍이어서 그랬는지 그는 거세게 밀어붙였다.
“지선 씨는 포근하고 이해력도 있는 것 같아요.”
이해력. 길게 더듬을 필요는 없었다. 오래전 『목욕하러 갑니다』라는 책 ‘작가의 말’에 털어놓았던 가난한 여성작가의 무표정한 이해력(지금은 동의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거였다. 나야말로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섰을 때 나는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느냐고 제안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딱 한 번만이라도 일인칭 단수 시점으로 말해 보면 안 될까요? 사과는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냥 행간으로 가라앉혀야 할 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늘 그렇듯이 그와 같은 모험에는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거대 쇼핑몰 앞에서 헤어졌고 그는 아파트로 돌아갔다.
전철역으로 내려가기 전에 미유에게 치킨을 시켜 주기로 마음먹었다. 바삭바삭한 오븐구이의 자태가 군침을 돌게 하는 바가 있었지만 치킨이라는 단어로 반찬값을 덮어쓰기 하지 않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처음 하는 배달주문임을 의식하면서 열심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생각지도 않은 메시지가 나타나 화면을 채웠다.
위치정보를 허용하시겠습니까.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내 손은 이미 ‘아니오.’를 누른 다음이었다. 메시지 창은 사라지고 오븐구이 메뉴가 뜨는가 싶더니 다시 창이 나타났다. 위치정보를 허용하시겠습니까. 아니오, 라고 눌러도 창은 나타나고 또 나타났다. 아니오, 아니오. 부랴부랴 휴대폰을 닫았다.
주문에는 실패했지만 덮어쓰기는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