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나이도 삼십이 다 되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어른'이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다. 어른이라고 말하기에 아직 대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중이라 '학생'이라는 말이 어울리고, 그렇다고 '학생'이라고 말하기에 나이를 많이 먹어 '어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 문득 '어른'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할 볼 때가 많다.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고 보니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는 자기 모습을 깨달을 때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말해 돌도 씹어 먹는다는 나이에는 한창 앞만 바라보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뒤를 돌아보며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할 일본 소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의 주인공도 문득 지난날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했던 사랑,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소설 속 마흔세 살의 중년 남성인 주인공이 지난날을 돌아본 계기는 페이스북 친구 목록에 뜬 알 수도 있는 사람으로 뜬 어떤 인물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의 주인은 주인공이 치기어린 젊은 시절에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인 '오자와(가토) 가오리'의 이름이었다. 이때 저자는 가오리의 모습을 '지난날 나 자신보다 소중했던 여자'라며 묘사를 한다. 주인공에게 있어 나 자신보다 소중했던 여자. 이 짧은 문장 하나만으로 가오리가 어느 정도의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가오리의 이름을 보면서 동요하던 주인공은 실수로 그만 친구 신청을 눌러버리고 만다. 예기치 않게 발생한 일에 당황한 주인공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우두커니 서서 '친구 신청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알람 표시가 떠 있는 화면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주인공처럼 헤어진 연인에게 친구 신청을 했다면 과연 어떤 심정일까?
그 심정이 어떤 심정일지 쉽게 추측이 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는 그렇게 주인공이 실수로 친구 신청을 한 탓에, 복잡함 심정으로 과거와 지금을 떠올리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주인공이 처음 가오리를 만난 계기가 '펜팔'이었고, 주인공이 중년이 되어 가오리를 다시 떠올리게 된 계기가 '페이스북'이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오늘날처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발전하지 않은 지난 시절은 펜팔이 일종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저자가 다룬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교차는 과거와 오늘을 뜻했다. 저자는 과거와 오늘을 오가면서 주인공이 떠올리는 지난날의 추억만 아닌 그 시절에 살았던 모습이 소설에 깊이 잠길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는 단순히 지난 시절의 사랑을 떠올리는 소설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잠시 숨을 고르면서 깊이 생각에 빠지는 장면을 만나곤 했다. 사랑을 해보지 않았어도 사랑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 또한 일단 오늘을 열심히 살고자 했기 때문에 몇 번이나 책을 읽다 멈춰서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래의 장면은 그렇게 멈추었던 장면 중 한 장면이다.
그날 처음 만난 가오리를 평생 잊을 수 없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그때까지 한 장의 그림을 보고인생이 바뀌었다느니, 한 권의 책을 읽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느니 하는 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말을 유치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가오리를 만난 날 내 인생이 달라졌다. 비로소 오래도록 멈춰 서 있던 내 고장 난 생의 시계가 째깍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오리 앞에서 만큼은 결단력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었다. 인생의 목표를 상실해 하루하루 연명하듯 힘없이 살아가는 패배자가 아니라 강한 추진력으로 꿈을 펼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동경해마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심지어 나는 그날부터 당장 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펼쳐나가기로 결심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나는 가오리를 진지한 상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본문 52)
도대체 사랑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주인공이 삶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펼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걸까. 한 번도 눈에 콩깍지가 씌어 본 적이 없는 나는 책을 읽더라도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이만큼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기도 했다. 역시 사랑은 마법인 걸까? 주인공의 삶을 엿보며 경험해보지 못한 사랑에 대해 고민해보는 것도 잠시, 다른 장면에서는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대로 일을 그만두고 멀리 달아났으면 좋겠어."
나는 사무실에서 여전히 팩스로 들어온 발주서를 줍고 있을 세키구치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무렵 나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자주 불만 섞인 푸념을 쏟아냈다.
"왜, 멀리 달아나고 싶은데?"
"아무런 전망도 보이지 않는 일상이 반복되는 게 싫어. 차라리 해외로 나가 자극을 받게 되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대로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외국으로 떠났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목적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뿌연 안개 속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할지 뚜렷한 목표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숨도 자지 못하고 술을 마신 다음 날 느닷없이 여행을 떠나자고 했던 가오리 역시 전망이 불투명한 안개 속을 거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본문 111)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것은 청년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보았을 바람이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어른이 되어도 결국은 또 이렇게 반복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어딘가로 떠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증거다.
살아간다는 건 한순간의 고민을 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고민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나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있는 목적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뿌연 안개 속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라는 말처럼, 마음이 가는대로 떠난다고 해서 안개가 걷히면서 보이지 않았던 목적지가 보이는 건 아니다.
지금이 너무 막막해서 미래가 없어 보이겠지만, 지금을 살아가지 않고서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는 없다. 나는 우리가 고민을 위한 고민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나는 우리가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민을 멈추고 지금에 집중한다는 것은 '나에 대한 책임을 질 각오'를 한 어른의 일이니까.
오늘 이 책, 일본 소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를 읽게 된 계기는 제목에 적힌 '어른'이라는 단어가 특별히 와 닿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오늘 생각하는 '어른'은 무엇인가? 지난날을 돌아보며 오늘 당신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지금, 어른이 된 지난날을 다시 떠올려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