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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후 미우 Jul 19. 2018

악몽

만약 악몽을 꾼다면 내가 꾸는 악몽을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아무리 열림 버튼을 눌러도 열리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끝없이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꿈.

하나는 매번 이를 악물고 발버둥 치면서 다수의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꿈.


악몽은 원래 자신에게 깊이 자리잡은 트라우마가 원인이 된다고 한다.

엘리베이터 악몽을 꾸는 이유는 내가 중학교 시절에 엘리베이터에 갇힌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날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처음에는 뉴스에서 본 것처럼 '비상 전화' 버튼을 누르면서 침착하게 대응하려고 했지만,

정전된 탓인지 비상 전화 버튼을 눌러도 아무런 응답이 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그때부터 조금씩 패닉에 빠진 나는 문을 두드리며 "살려주세요!"라고 외쳤다.


정전되고 내가 돌아오지 않는 걸 깨달은 어머니가 내가 엘리베이터에 갇혔다는 걸 눈치채고,

경비실 아저씨와 사람들을 데리고 온 덕분에 나는 갇힌 엘리베이터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때 문을 잘못 두드리다 엘리베이터가 추락이라도 했으면… 정말 끔찍하다.


그 일은 아직도 깊은 트라우마가 되어 있어 종종 악몽을 꾼다.

아무리 열림 버튼을 눌러도 열리지 않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위해 열심히 열림 버튼을 누르는 꿈을.

꿈속에서 열리지 않는 엘리베이터는 끝없이 위로 올라가거나 끝없이 내려간다.


그러다 익숙해져 '또 똑같은 꿈이네. 계속 내려가거나 위로 올라가면 어디로 가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때를 끝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힌 꿈은 잘 꾸지 않게 되었는데,

아마 그때 비로소 내가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기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에 겪은 학교 폭력에 대한 기억은 이겨내지 못한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얼굴을 볼 수 없는 인물들의 폭력에 저항하는 꿈을 꾸다 잠이 깨었다.

온몸에 쥐가 나서 꼼짝할 수도 없는 상태였는데, 이게 소위 말하는 가위에 눌린다는 걸까?


꿈속에서 나는 그 폭력에 저항하고자 고래고래 고함을 치기도 했고,

어디선가 식칼을 꺼내서 얼굴을 볼 수 없는 인물들을 죽이고자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나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나를 탓하며 나를 죽이며 눈을 뜬다.


내가 나약하기 때문에, 내가 똑바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통한 심정에 이를 악물고 저항하다 결국에 나는 저항을 포기해버린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다수의 폭력에 시달리는 악몽을 꾸는 건지도 모른다.


최근에 읽은 <리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이라는 라이트 노벨이 있다.

제일 최근에 나온 10권부터 15권까지는 '성역'이라는 장소에서 세 가지 시련을 받는 에피소드다.

그 시련은 과거를 돌아보는 일,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보는 일, 그리고 마지막은 다가올 미래를 보는 일이다.


자신이 괴로워한 과거를 마주하며 '지금의 나'를 인정해야 첫 번째 시련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겪은 고통이 없는 현실을 부정하며 '그때의 고통은 나의 자양분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두 번째 시련을 이겨낼 수 있고,

불안한 미래도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세 번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다.


<리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의 주인공 나츠키 스바루와 히로인 에밀리아는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그 시련을 이겨내게 된다. 만약 그 시련을 지금의 내가 겪는다면, 과연 나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나를 옭아매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고 있으니….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해도 '나를 사랑하는 일'은 되기 어렵다.

여전히 이유가 없었던 불합리한 다수의 폭력에 저항하는 꿈은 오늘을 곱씹어보게 한다.


오늘도 나는 악몽을 꾸면서 내가 이겨내야 할 시련을 다시 마주한다.

다음에는 기필코 악몽을 이겨내겠다고 다짐하지만,

나는 지금의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이 어려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다.


이 악몽이 끝나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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