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일 좋아하는 광고는 김지원 배우가 나오는 한화손해보험 광고다. 해내는 것보다 해보는 것, 이라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김지원 배우의 나레이션을 듣다 보면 조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엊그제는 구혜선 배우가 나오는 예능 클립을 잠깐 봤다. 구혜선 배우는 박사를 따고 싶다고, 그걸 따고 나면 배우가 아닌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누군가는 '나이가 마흔인데'로 운을 띄워 질책을 남겼고, 다른 누구는 '나이가 마흔인데' 뒤에 '수석을 했다'며 응원을 남겼다. 공부하는 게 제일 좋다는 배우의 말에 '힘든 일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며 속을 뚫어보려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도 내가 사는 세상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넷 세상에서 사람들 말하는 걸 들어보면 '우리나라는 너무 빠르게 커버려서 시민의식이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말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언젠가 그 말을 보며 생각했다. 성장하지 못한 게 아니라, 잘못 성장한 거야.
나는 우리나라를 관통하는 단어가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내보일 때 자부심을 느끼고, 다른 이들과 끊임없이 경쟁한다. 경쟁을 피하는 건 낙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를 관통한 경쟁으로부터 많은 것들이 파생됐다. 개인주의, 비교, 우월의식, 권태, 우울, 번아웃 그런 것들.
서로가 경쟁상대니 개인주의일 수밖에 없고, 경쟁을 위해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해체해 비교하는 습관이 있고, 그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취학연령이 되자마자 모든 것을 경쟁하며 살아온 이들은 경쟁에 질려 세상이 권태롭고, 시달리다 보니 우울하고, 권태와 우울이 들이닥치면 번아웃을 깨닫고.
그냥 우리는 그렇게 성장했다. 성장하지 못한 게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치평가하는 방식으로 성장했을 뿐이다.평가기준은 경쟁력과 돈이다.
게으른 완벽주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것도 요즘 2030 세대의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게으른, 완벽주의.
완벽에 대한 강박이 있지만 완벽하기에는 게으르다. 완벽을 위해는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하는데, 하루에 9시간을 근무하고, 출퇴근에 또 두어 시간은 빼앗기고, 잠도 7시간은 자야 하는 세상 루틴에서 노력에 시간을 쏟기는 너무 벅차다. 남는 예닐곱 시간 동안 (사실 이것보다도 조금 남는 사람이 태반이겠으나) 아침저녁으로 밥 먹고, 씻고, 집안일하고 나면 진짜진자 남는 시간은 하루에 서너 시간이 될까 말까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서너 시간만이라도 쉬어야 한다. 완벽해지기 위해 노력할 여유 따위 없다. 공부나 취미를 하고 싶다면 그건 기호의 영역에 있어야 하는 게 맞다. 치열할 필요 없는 일인 게 맞다. 그냥 나를 나답게 하는 일 정도여도 충분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자꾸 '나를 나답게 하는 일'마저 완벽하기를 바란다. 완벽하지 않으면 세상에 내보이길 꺼려한다.나는 그림을 sns에 올리는 데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림에 전념할 수 없는데, 세상에는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올렸다 지웠다 올리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마저 비교하고 경쟁해 버리는 거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을 자기 계발이라는 아주 열정적인 단어로 감싸둔 세상이니까.
사실 게으른 완벽주의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틀려먹은 단어 아닌가? 남는 시간이 고작 하루 서너 시간인데, 그전까지 아주아주 부지런하고 바쁘게 살아야 서너 시간이 남는데, 그 시간마저 치열하게 살지 못한다고 게으르다고 하면 세상이 너무 팍팍하다.
우리가 왜 경쟁에 관통당한 삶을 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주 작고, 뼈아픈 역사가 있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열망을 가지고 있으니까. 뼈아픈 역사를 딛고 뼈아프게 노력해 삶을 개선했고, 개선방법은 인적자원의 경쟁력 확보였으니까. 원래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경쟁력은 아주 확실한 성장수단이었고, 노력으로 만들어졌으니 일종의 정답인 거다. 그래서 우리 세대는 자아가 생길 무렵부터 경쟁심리를 체화시켰다. 그게 돈이 되니까.
하지만 한 때 경쟁이 삶을 피우는 수단이었듯, 지금은 경쟁이 목을 조이는 수단이 되고 있지 않나. 정답이라기에는 우리, 경쟁으로 너무 많은 재능과 생명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지 않나.
구혜선 배우가 나이 마흔에 박사를 결정한 데에 대고 질책하거나 심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드는 댓글들은 마치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어떻게 너 좋은 것만 하며 살 수 있어, 경쟁에서 멀어지는 건 낙오야, 낙오에는 이유가 필요해, 그런 말들을. 돈을 많이 벌었다며 그게 마치 면죄부라는 듯 말하는 댓글도 왕왕 보였다. 아주 본질적인 댓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사람들이 그의 학업에 화가 난 건 학업에 열중하며 돈을 벌지 않기 때문일 확률이 크니까.
글쎄. 경쟁에 지쳤든, 나다운 일을 하고 싶어졌든, 사실 우리가 그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아마 본인도 모를 거다. 나도 나의 모든 행동을 일목요연하고 논리적으로 서술할 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쓰고 보니 웃기다. 대부분의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알 수 없고, 스스로마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데, 모두가 돈과 경쟁을 어떤 지표 삼아 걷는다는 게.
전에 말한 적 있는데, 나는 인스타툰을 올린다. 팔로워는 200명이 채 안 된다. 내가 인스타툰을 올린다고 말하면 누군가 말한다. 그거 돈 돼? 아니면 요즘에 그걸로 돈 버는 사람 많다더라, 하고. 돈을 벌 수 있으면 좋겠지. 그걸로 돈을 벌면 나는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거고, 어쩌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테고, 그러면 '돈을 버는' 일을 하던 시간에 '나를 나답게 하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그냥 그림 그려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내 얘기를 쏟아내고, 모르는 사람과 무턱대고 애정 어린 응원을 나누는 게 좋다.
목표는 글쎄. 내가 책을 낼 때 인스타툰으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팔로워 1000명 만드는 것. 돈은 목표에 없다. 그리고 이마저도, 해내는 것보다는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마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게으른 완벽주의'라는 말을 왕왕 사용한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권태를 느껴도, 아무리 여유로운 순간순간을 사랑해도, 나는 삶을 치열한 것으로 배웠으니. 돈을 위한 경쟁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치열함.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추구미가 치열함이라는 걸 이미 10살 남짓부터 알았다.
언젠가는 나를 뭐...'무조건 시도주의' 그런 걸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