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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 Won Oct 11. 2020

연어가 돌아왔다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 듣고

  가을이 깊어가는지 오후 6시가 되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이사 온 새동네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빈터가 없는 걸로 봐서 조만간 동네는 정돈될 것 같다. 어둠이 살짝 걸칠 때쯤 운동화를 신고 마스크와 이어폰을 챙긴다. 미리 세팅한 음악이나 오디오북을 들으며 걷다 보면 흩어졌던 생각들이 차분해져 자주 걷는다. 오늘은 1854년에 시애틀 인디언 추장이 쓴 연설문을 들으며 걸었다. 추장의 연설문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고, 인간이 지녀야 할 덕목을 쓴 지첨서 같다. 중간중간 마음 한편이 아릿해 자주 걸음이 멈췄졌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들꽃이, 작은 돌멩이 그리고 차가운 공기가 이 연설문을 듣는 동안 눈에, 마음에 들어왔다.


  시애틀 인디언 추장(드와 미쉬-수과 미쉬족의 추장)의 연설문은 미국 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인디언들이 오래전부터 살아온  땅(오늘의 시애틀 지역)을 자기들에게 팔고, 떠나라는 강압적인 요구에 대한 그의 답글이다. 이문건은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한 "고문서 비밀해제"로 120년 만에 세상에 햇볕을 본 것이다. 당시 피어스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 감복해 이 지역을 추장의 이름을 따 "시애틀"이라 명명했다. 미국의 워싱턴 주에 있으며 캐나다 접경도시 태평양 연안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시애틀시>가 된 것이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고 백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그들의 삶의 터전과 목숨까지 빼앗긴 인디언들의 아픔을 이 연설문은 잘 표현해준다. 


  어릴 적 외화의 대부분의 장면은 백인 보안관이 불량한 인디언을 죽이거나 체포하면 환호하던 백인들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얼굴에 줄이 그어지고 깃털 같은 모자를 쓴 인디언들의 모습이 무섭게 느껴졌다. 조금 커서는 교육을 통해 땅의 주인은 원주민인 인디언이고 그 땅을 빼앗은 것이 백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렇게 마음이 아프진 않았다.  시애틀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을 들으며 걷다 보니 가슴 한편이 아릿해 왔다. 너무 아릿해 발걸음을 몇 차례 멈추고 다시 듣기를 반복했다. 그의 연설문은 자기의 부족민과 터전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그의 절절함이, 그러면서 약탈자인 백인들에게 단호하게 꾸짖듯 표현한 그의 모습이 거룩해 보였 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 어떤 글보다 아름다웠고 꽃처럼 향이 났다. 


  어머니인 대지를, 공기를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느냐라고 말하는 추장의 연설문에 나는 그만 눈물이 났다. 연어가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겨울의 식량의 양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그들. 인간의 손에 만들어지지 않은 모든 것은 자연이며 그 자연을 부모 다르듯, 자식 다르듯 한 그들. 가슴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말의 언어로만 알아듣는 사람을 보면서 느꼈을 그들. 다 빼앗기고 세상에 남겨지지 않은 순간에도 죽는 것이 아니고 다른 세대가 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 

 

  아직도 공사 중인 동네인 흩어진 돌이 많아 평소 걷다가 발에 부딪히는 작은 돌멩이를 들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오늘은 차마 그 돌이 비록 발이 부딪쳐도 손을 될 수가 없었으며, 들꽃이 죽는 게 아쉬워 내 집 정원에 옮겨놓는 것조차 부끄럽게 느껴졌다. 자연은 내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것이라는 추장의 말이 내 귓전에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나라를 빼앗긴 인디언들의 수장인 시애틀은 아주 담백하게 그러면서 단호하게 남의 것을 탐하는 우리를 꾸짖는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씻지도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그 연설문을 눈으로 읽었다. 연설문 혹은 편지라고 전해지는 그것을 읽으니 감동이 배가 되는 것 같다. 손끝에 만져지는 종이의 촉감은 없지만 좋은 글을 듣거나 읽으면 가슴이 뜨거울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시애틀 추장이 말할 때마다 얼굴이 붉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인디언을 말하는데, 그는 얼굴 하얀 사람이 믿는 주님은 우리에겐 없다고. 왜 그들의 기도는 들어주고 얼굴 붉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지 시애틀 추장은 말한다. 다양한 인종이 사는 이 미국에 아직도 백인이 우세인 것을 보면, 가끔 나 또한 우리들의 하느님은 왜?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콜럼버스 날을 원주민의 날로 바뀐다는 기사를 봤을 때 가슴에 얻힌 무언가가 조금은 내려가는 듯하다. 그들의 지혜가 연어처럼 돌아와 현대인의 마음을 움직여 서로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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