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다행히 오늘은 첫째의 유치원 버스도착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종이배를 더 접고 유치원을 가겠다며 꾸물럭대는 아이에게 원복과 양말을 챙기고, 물통이 가방에 제대로 들어가있는지 확인하다 둘째 내복을 갈아입히는 걸 깜빡했다. 겨우 준비해서 신발신고 나가려는데 꼭 나갈 때 이런게 보이더라. 부랴부랴 겉옷 가디건만 입히고 유모차에 넣는다. 걷고 싶어서 버둥거리지만 지금 시간에 둘째의 걸음에 같이 걸어맞춰 가기엔 촉박한 시간이기에 유모차에 태운다기보다 넣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짧지만 강렬한 아침시간의 흔적을 거실 바닥이 보여주고 있다. 주섬주섬 아이가 갈아입은 옷가지들과 식탁위에 먹다 남은 밥풀조각들을 행주로 닦는다. 새벽에 남편이 갈아입고 나간 속옷과 수건도 함께 넣으니 어느새 빨래바구니에 빨래가 가득이다.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로 아침의 부산함이 남아있는 먼지를 쓸어본다. 둘째도 주방놀이 장난감에 붙어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만들고있다. 이때다. 믹스커피가 가장 맛있는 시간. 휴 하고 한숨돌리는 시간. 이때 한잔 마시는 믹스커피는 아침의 부산했던 나를 위한 달달한 충전이자, 앞으로 남은 하루에 해야할 예고된 노동의 시간을 맞이하는 나만의 리츄얼과도 같다.
믹스커피는 노동과 잘 어울린다. 뭔가 일을 하기 위해 힘을 쥐어짜야 할 때, 그리고 그 일을 하기위한 다짐이 필요할 때. 믹스커피의 맛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사회생활의 맛을 알게 된 때였다. 뭘 해도 다 혼나고 실수투성이였던 사회 초년생의 시절. 대학 4학년의 고참생활을 하며 인생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다가 회사에 들어오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는 게 없는 어린이가 되었다. 그런 어린이가 늘 혼날 걸 알면서 출근하는 기분이란 정말 고역이었다. 여느 출근날과 같았던 때, 아직 출근 한 사람이 몇 없는 한산한 사무실 한켠에서 옆 팀의 선배언니가 손짓을 하며 불렀다. 탕비실에서의 믹스커피의 맛을 알게 된 때는 그때 부터였다. 노동의 현장에서 맛볼 수 있는 틈.탕비실이 믹스커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다. 회사 안이지만 회사 안 같지않은 일터 안의 작은 숨구멍이 탕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탕비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믹스커피 한잔을 누구의 방해없이 마실 수 있다는 건,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몸의 알람과도 같았다. 지금도 가끔 탕비실에서의 믹스커피 맛을 그리워하며 마셔본다.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쇼파에 걸터앉아서 마시는 커피와는 또 다른 맛이다.
그러고보니 믹스커피가 낯설지 않은 것은 엄마의 향이었다. 5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는 나는, 어릴적 항상 아침에 엄마에게 뽀뽀를 하면 나던 그 믹스커피의 향을 기억한다. 쓴 것 같으면서도 달콤함이 스치는 묘한 향. 그때는 엄마가 이걸 좋아하는 구나라고만 생각 했었는데, 지금 내가 엄마가 되어서 보니 어떤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엄마도 아마 그리움 한 스푼, 홀가분 두 스푼이 섞인 믹스커피로 충전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믹스커피가 가장 맛있는 시간을 찾은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