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예전에 감명 깊게 읽기도 했고 나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친 책 중에 법륜 스님의 “인생 수업”과 아툴 가완디(Atul Gawandee)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라는 책이 있다. 아빠 삶의 마지막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 마음이 힘들 때 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을 구하고 싶을 때 틈틈이 두 권의 책을 다시 읽었고, 유튜브를 통해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도 다시 들어 듣곤 했다.
법륜 스님은 부모님의 죽음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후 가을에 지는 낙엽과 같다 하셨고, 이는 모든 인간이 받아 들어야 하는 자연의 순리이며, 부모님의 죽음 후에 덜 후회하기 위해서는 살아 계실 때 더 잘해드릴 것을 당부하셨다. 남은 사람이 슬픈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해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면, 돌아가신 분도 가벼운 마음으로 이승을 떠날 수가 없다는 말씀으로 남은 이들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세도 가르쳐 주신다.
아툴 가완디가 쓴 책의 화두는 “어떻게 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삶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로 이해된다. 모든 인간은 노화나 질병 등의 이유로 어느 순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도움을 주는 것이 예전에는 가족의 역할이었으나 요즘에는 현대화의 영향으로 병원이나 요양 시설의 역할로 대체되면서, 개개인의 특성이나 기호,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들이 존중되기 힘든 현실이 되었다.
나에게도 병원에 입원했던 경험이 있었다. 민준이를 낳기 위한 3박 4일간의 짧은 입원이었다. 당시 나는 출산 예정일이 지나도록 진통이 없었고, 병원의 권유대로 유도 분만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분만 대기실에는 나 이외에도 7-8명의 산모가 더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관장을 한 후 출산 전까지 물도 마시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른 산모들이 출산을 위해 하나둘씩 대기실을 떠나갔지만 나는 밤 10시가 되도록 홀로 대기실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동안 여러 명의 의사들이 들어와 수시로 내진을 했는데, 한 번은 내가 방금 전에 내진받았다고 항의 아닌 항의를 할 정도였다. 출산 중에 피를 많이 흘렸는지 출산 후 수혈을 받아야 했고, 소변을 보는데 문제가 생겨 소변줄을 꽂아야 했는데 사실 아빠나 다른 심각한 환자들이 받는 처치에 비하면 정말 별 것도 아닌 처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내가 했던 생각은 병원에서는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의 경험은 요양 시설에 대한 것이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100세가 넘게 사시는 동안 심각한 질병에 걸리시진 않았지만 노화를 피해 가실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충남 병천의 시골집에서 막내 이모와 둘이서 사셨다. 막내 이모는 결혼해서 안동에 터를 잡았지만 나이 드신 할아버지를 홀로 둘 수 없어 병천에 와서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할아버지의 기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이모가 돌봄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고, 할아버지는 요양 시설로 모셔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한국에 갔을 때 할아버지를 보러 시설에 간 적이 있다. 내가 그 시설에서 받은 느낌은 깔끔하긴 했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수용해 놓고, 죽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삶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같은 방에 계신 분들끼리의 상호 작용 또한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으며, 시설 직원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 곳에 계신 외할아버지가 너무 안타까웠지만, 당시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라면, 그리고 우리 엄마 아빠라면 절대 그런 곳에 보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아툴 가완디의 책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병원이나 요양 시설에서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이나 획일화된 돌봄 보다는, 수십 년간 누려왔던 일상을 마지막 순간까지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한다. 병원의 사명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환자의 수명을 연장하는 일이다. 심장이 멎은 환자에게 심폐 소생술을 시행하고,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삽관을 통해 영양을 공급하면서 수명을 연장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처치가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있는 환자에게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를 한다. 하지만 신체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노인이나 중증 환자들에게 이러한 시도들은 결국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그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문구가 책에 나온다.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즉 너무 깊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깊이 공감했다. 이러한 상황이 나에게 닥쳤을 때 나 역시 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사들의 공격적인 치료를 받아가며 의미 없는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닥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고, 실제로 아빠가 병원에 계셨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떤 선택이 아빠에게 더 나은 선택이 될까를 고민하며 수많은 갈등을 했었다. 아툴 가완디는 정말 시작하기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대화를 통해 환자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전에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브레이크 포인트 대화(Breakpoint Discussion)라고 부른단다. 책에 나온 예는 다음과 같다.
완화 치료 전문가인 수전 블록(Susan Block)의 74세 아버지는 목 부분 척수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앞두고 수전 블록과 아버지는 다음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생명 유지를 위해 얼마만큼 견딜 용의가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상태면 사는 게 괴롭지 않을지 알고 싶어요.”
“글쎄,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식축구 중계를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살고 싶구나. 그럴 수만 있다면 통증이 좀 심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어.”
수술 후 척수에 출혈이 생겼고, 아버지를 살리려면 재수술을 해야 하지만 이미 사지는 마비가 된 상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수전 블록은 재수술을 부탁한다. 그것이 아버지가 원한 바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툴 가완디의 경우에도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가 70대 초반 목에 통증을 느낀 후 척수 종양 진단을 받게 되었다. 2명의 전문의와 상담을 했는데, 한 명은 바로 수술을 하자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수술을 받게 되면 사지 마비가 되거나 사망할 확률이 4분의 1이나 되니 수술 시기를 최대한 늦추자고 했다. 아툴 가완디와 아버지 모두 외과 의사였기 때문에 확신을 갖기 위해서 치료나 수술 방법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자의 의사는 ‘본인은 경험이 많은 의사이고, 본인의 도움을 받고 싶은지 아닌지는 환자가 선택할 문제다’라는 답변을 했을 뿐이고, 후자의 의사는 시간을 들여 성의 있게 답을 해주고 환자의 불안에 공감을 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가완디 부자는 뒤의 의사를 선택했고, 이후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종양은 커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일상생활에는 한동안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가완디 부자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병원에서 볼 수 있었던 의료진들은 대부분 전자의 의사 유형이었다. 항상 바쁘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보호자들이 질문하거나 부탁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같은 사람이 알아듣기 힘든 의학적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환자를 내 가족처럼 생각하고 건네는 진정성 있는 말 한마디가 약을 백 번 먹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툴 가완디에게도 시간은 다가왔다. 아버지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수술을 더 늦출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물었고, 아버지는 죽음보다 사지가 마비되는 것이 더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아툴 가완디는 아버지에 대한 결정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이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사실 이 책을 몇 년 전에 읽었고 어렴풋하게 나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런 일은 나에게는 한참 뒤에나 발생할 일이라고 단정을 했었다. 실제 일을 겪으면서도 아빠와 이런 식의 대화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껄끄럽게 느껴졌고, 결국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병원 기록을 통해 아빠가 DNR(Do Not Resuscitate)에 동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가 아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많이 혼란스럽다.
아빠가 너무나 갑자기 빠른 속도로 허물어져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자체가 많지는 않았지만, 주치의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면서 조만간 중환자실로 가시게 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장 아빠가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 케어를 받았다면 건강이 회복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주치의와 상의할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마지막 진통제 처방에 대한 동의는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아빠가 진통제를 안 맞았으면 며칠이라도 더 사실 수 있었을 텐데, 우리의 섣부른 결정으로 아빠의 귀중한 생명이 단축된 것은 아니었을까? 아빠가 많이 고통스러워하셨지만, 그래도 아빠는 강한 사람이었는데, 아빠의 의견을 먼저 구했어야 했던 건 아니었을까? 고통스러워하는 아빠를 보는 우리 자신이 너무 힘들어서 내리게 된 결정은 아니었을까?
아빠가 진단을 받고 빠르게 마지막으로 치달았던 이유가 우리의 간병이 서툴러서 아니면 뭔가 드리면 안 되는 음식을 드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빠에게 간암 2-3기라고 이야기했던 것이 잘한 일이었을까? 아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이야기해주고, 아빠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드렸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아빠 본인이야말로 제대로 알 권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아직도 아빠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채 수없이 많은 질문만을 던지고 있다. 아빠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아빠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졌던 부분에 대해 아빠에게 너무나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나는 원래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기 쓰기는 초등학교 방학 숙제 중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숙제였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단지 아빠에 대한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글을 꼭 써야겠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아빠는 평생을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위치에서 힘든 삶을 살아왔을 것이고, 가끔은 수치스러운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나도 사실 아빠를 창피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은 내가 어느 정도 사는 집에서 곱게 자란 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가끔 아버지 뭐하시냐는 질문을 했었다. 나는 아빠가 공부를 많이 못하셔서 운전기사 일을 하고 계신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워 그냥 작은 회사에 다니신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나는 사실 곱게는 자랐다. 엄마 아빠가 당신들을 희생해 가며 부족함 없이 키우려고 노력하신 덕이다.
지금이라도 아빠에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빠를 자랑스럽게 소개하지 못했던 일, 아빠를 외롭게 했던 일,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일, 아빠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일, 아빠를 잘 살피지 못했던 일 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빠가 살아 계실 때 한 번도 못했던 말,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아빠는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리 시진 못했지만, 아빠가 처한 상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셨던 분이고, 아빠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아빠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갖고 있으며, 우리 가족에게도 항상 든든하고 힘이 되어 주는 좋은 남편이자 아빠였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빠는 아빠의 위치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던 분이고, 아빠의 삶은 우리 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큰 의미가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가치가 있는 삶을 사신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서글펐던 것은 아빠와 함께 한 기억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바쁘게 살고 있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을 많이 잊어버리기도 했고, 아빠는 가계를 책임지시느라 우리와 함께 했던 시간 자체가 많지 않았으며, 또한 아빠는 항상 한 걸음 물러난 곳에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든 묵묵히 지켜보고 조용히 지원을 해 주시던 분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아빠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아빠에게 다시 한번 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