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아닌가요? 맞나요?

by 블블

이직을 하게 되어 다니던 회사에 마지막으로 출근한 너는 그날 저녁 사람들과 회식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내게 전화를 했다. 너는 소맥을 몇 잔 먹고, 자리를 옮겨 맥주를 조금 더 마셨다고 했다. 그러다 몇 번을 내가 좋다고 읊조리더니, 그 동안 한번도 얘기한 적 없던 네 20대 초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술기운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사실은 그다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 말을 꺼내는 데에 어떠한 용기가 필요했다는 네 나름의 정황이 느껴졌다. 나는 네가 예상했던 대로 조금 실망했고, 그리고 그동안 도무지 풀리지 않던 의문을 조금은 풀게 되었다.


너는 내가 왜 좋을까.


나는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더 정확히 말하면, 네가 나 때문에 변해가는게 무서웠다. 가족을 만드는게 꿈이라던 네가 당분간 아이 낳을 생각이 없다는 내 말에, 네 가족들이 이해해주실 수 있을것 같냐며 다그치는 내 말에, 다음날 아침 바로 네 어머니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어떨 것 같아’ 묻고 오는 그런 류의 일들이 무서웠다.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왜 넌 나와 있는 것에 주저함이 없을까.


미래를 얘기하는 너를 볼 때마다, 그 곳에서 한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네가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던지면 조금 주춤하겠지, 얕은 수를 쓰며 도망다녔지만, 너는 내가 던진 방어미사일을 유도탄으로 오해했는지, 풀어야 할 미션으로 착각했는지 질문을 받자마자 재빠르게 해결지점을 향해 직진했다. 나름의 대안들을 손에 들고 내게 돌아왔다. ‘이러면 좀 괜찮지 않아?’ 세상 순박하게 웃으면서. 그런 너를 보면서 나는, 너는 왜 그럴까 신기했다.


사랑받는게 익숙지 않기도 하고, 연인관계라면 응당 이래야지하는 어떤 전형도 나는 잘 모르는데, 너는 내 눈 앞에서 너무 쉽게 변했다. 어떤 사람의 꿈이, 가치관이, 내 말 한마디에 휙-휙- 변하는 것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진짜일까 의심이 들었다. 진짜 아이가 없어도 괜찮은걸까. 진짜 나랑 있으면 편한걸까. 설령 진짜라 할지라도 왜 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걸 감내하려고 하는걸까. 어째서? 왜?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보다 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건 그런 널 보며 마냥 행복해하지 않는 내 모습이었다. 사랑한다면 너처럼 다 쉬워야 하는 거 아닐까. 사랑을 하면 당연하게 변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로 인해 누군가 변해간다면그것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닐까.


너처럼 내 세계가 쉽게 변하지 않는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닐까. 나로 인해 변해가는 널 보며 두렵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을까. 그럼 내가 지금 여기서 너랑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신의를 지키는 일인가. 연인놀이를 하고 있는 걸까. 그치만 왜 나는 네 연락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일까. 외로운 걸까. 사랑이 아닌 걸까. 사랑이 아닌건가. 사랑이 아니야..?


모든게 쉽지 않아서, 너에 맞춰 내가 영 변하지 않아서, 그게 언젠가 우리가 끝나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두려워서. 그래서 나는 네 사랑이 두려웠다. 나는 그럴 수 없는 인간이다. 내가 그럴 수 없는 인간이기에 너같이 사랑하는 일이 ‘쉬워보였던’ 것이다. 의심이 깊고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서.


며칠 전, 그날밤 통화에서 네가 주저리 주저리-하지만 마음에 먹은 말은 다 해야되겠다는 단호함을 가지고-이야기들을 진행해 나가는 동안, 네가 내게 했던 일들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누가 보기엔 전혀 중요하지도 않을 일들이 그 때 어린 네게는 생의 걸림돌이었고, 너 역시 너를 사랑하는데 누구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내게 고백할 때까지 혼자 어지간히 마음을 졸여왔음을. 버림받을지도 몰라 두려워하며 입을 열었다는 것을.


지금껏 내게 너는 삼겹살이나 치킨을 먹으면 함박 웃으며 맛있다고 어깨를 들썩거리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어쩜 저렇게 사태의 좋은 점만 보는 평형감각을 가졌을까, 신기한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 단순함과 순박함이 생경하긴 하지만, 네 인생에도 어두웠던 시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에게도 나와 같은 시간이 있었구나. 스스로를 예뻐하지 못해 자신을 괴롭히던 시간들이 길었구나.


그래서 너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를. 처음으로 나는 네 시간 속에서 나와 닮은 지점을 보게 되었다. 비록 모든 사태의 부정적인 면을 먼저 보는 삐딱한 시선에, 행동보다 고민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해 시작도 전에 미리 지쳐있는 복잡한, 너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온 나날 중에 어떤 시기에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오래 불안에 떨고 지쳐있었던 인간이었음을.


지금 여기의 나는 여전히 삼겹살이나 치킨을 먹는다고 너와 함께 어깨춤을 출 정도로 비글 여친은 아닐지라도. 네가 추는 어깨춤이 타고난 낙관의 DNA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추는 춤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여전히 나는 너를 쉽게 사랑할 수는 없다. 사실은 아직도 매일 매일 네가 더 잘나고 똑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삐딱하고, 독선적이고.


너는 새벽 여섯시반에 일어나 출근을 해야하니까 한량인 나처럼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여전히 속으론 나보다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작품을 내 기분에 맞춰 추천해줬으면 좋겠다. 그 작품들 속에서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흥미로운 지점들을 네가 짚어주면 좋겠다. 또 네가 지금보다 날씬했으면 좋겠다. 평범한 사이즈라 옷을 살 때 아무데나 들어가서도 네게 맞는 바지와 신발이 있었으면 좋겠다. 맞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못한다. 매일 살을 빼라고 구박하고, 책을 읽으라고 닦달한다. 내 세계를 바꾸는 일은, 내 눈에 좋은 것에 너를 끼워맞추려는 이 편협한 태도는 여전히 변하질 않는다. 나는 아직도 쉽지 않다. 하나하나 걸리지 않는게 없다. 너를 쉽게 사랑하는 일이 너무나 어렵다.


하지만 네 삶의 어려움이 왜 어려움이었는지, 어떤 어려움이었는지 듣자마자 마음이 철렁했다면. 그것을 털어놓고 듣는 일로 서로 위안이 되었다면, 내 어려움에도 어떤 실마리가 있는 것 아닐까. 연애를 시작하고 삼백 여일 동안 짐작도 못했던 ‘대체 너는 나를 왜 좋아할까.’라는 의문의 답을 어렵사리 찾은 것처럼. 그래서 네가 내 곁에 있어주는 이유를 알게 된 것처럼.


그러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어렵게 사랑하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일단 지금은, 쉽게 사랑하지 못한다고 쉽게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짓지 않겠노라고. 나를 하나하나 납득시켜야하는 어려운 사랑도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이 모든 일들이 다 걸리적거리고 혼란스럽다면, 하나하나 붙잡고 들여다보는 수 밖에. 따지고 닦달하고 어렵게. 또 어떤 지점에서 도망다닐 수 밖에 없다면 네가 들고 온 대안에 ‘그 정도로는 안되겠어,’ 대답하고 다시 또 방어 미사일을 던질 수 밖에.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네가 여전히 내 곁에 있어준다면. 그 때에도 쉽다면, 단순하다면, 긍정적이라면. 그러다 어떤 날에 내가 먼저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도, 진짜 어떤 날에는 치킨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어깨춤을 출 수도 있으니까. 세상의 즐거움을 모르던 네가 그렇게 변해갔던 것처럼. 나도. 그래서 너와 나를 보는 어떤 누구의 눈에는, ‘와 참 쉽다. 저런게 사랑인가봐.’ 오해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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