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름
"무심한 사람, 죽으려면 새끼들 낳기 전에 죽지! 아이고,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어떻게! 허으으흑......"
술병으로 돌아가셨다고도 하고, 맹장이 터져 죽었다고도 했다.
1961년 1월, 서른여섯 나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막내 동생을 잉태하고 있었다. 내가 일곱 살 때였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 살던 아버지 최기현, 엄마 김향화는 1925년 열다섯 동갑내기에, 중매로 결혼했다. 나는 1954년 7월 28일 가난한 산골인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에서 첫 딸로 태어났다. 정확히는 셋째 딸이다. 내 위로 언니 둘과 오빠 한 명이 죽었다고 한다. 죽음은 늘 주변에 있었다. 태어나면서 사이사이 죽는 형제가 많았다. 그래서 여덟 살 위 큰오빠 종길, 두 살 아래 여동생 영자, 다섯 살 아래 남동생 종희가 살아남은 내 형제들이다.
막내를 유복자로 낳고 얼마 후 큰아버지가 엄마에게 아이들은 자기가 거둘 테니 재가하라고 하셨다. 누가 봐도 엄마는 어리고 약해 보였다. 엄마는 노발대발하셨다.
"무슨 소리 하는 거라? 내 새끼들 두고 어디를 가! 내가 키워요! 내가!"
서른여섯 엄마는 그렇게 세상의 무게를 짊어졌다. 유복자로 태어난 동생을 내가 업어준 기억이 드문드문 있는데, 그 아이도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 아버지 없이 태어나 금방 하늘나라로 가버린 것이다.
엄마, 아버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거의 없다. 내가 아는 건 그저 아버지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다쳐서 집에 돌아왔고, 그 뒤로 종종 술과 여자 문제를 일으키며 세월을 보냈다는 것뿐이었다.
"니 아버지는 글씨를 잘 썼어. 한자도 많이 알았지. 마을에 계약서 써야 할 일이 있으면 가서 대신 써주고 그랬어."
아버지는 무엇을 품고 살았을까? 전쟁과 가난의 굴레 앞에서 삶의 의욕을 잃었던 것일까? 너무 일찍 떠나버려 들은 적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도 아버진 너를 예뻐했다. 영숙이 크면 선생님 시킬 거라 했다. 만날 니만 데리고 동네로 마실을 다니셨어."
딸들을 잃고 내가 아버지 첫 딸이라 예뻐하셨을까.
"해 지면 니는 아부지 언제 오나 하고 동네 어귀에 나가 한참을 기다렸어."
난 아버지 기억이 별로 없다. 어렴풋이 장례 치르는 날 떡 받으러 간다고 철딱서니 없게 좋아했던 게 떠오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 음력 1월은 큰오빠가 막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즈음이었다. 남편 없이 혼자가 된 엄마와 줄줄이 달린 어린 동생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집안에 가장이 되어버린 오빠는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는데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집으로 왔다. 다음날부터 집에서 엄마를 도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큰 아들은 의지할 수 있는 남편 대신이자 희망이며 미래였다. 엄마는 모든 집안 대소사를 장남과 상의했고, 막내아들은 없는 형편에도 금이야 옥이야 길렀다.
한동안 큰오빠는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을 모르는 엄마와 동네 어른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춘하 엄마, 복순이 엄마 등 네댓 명을 모아 야학을 연 것이다. 그런 덕분에 엄마는 겨우 자기 이름 석 자를 쓸 수 있게 되었고 숫자도 익혔다.
1.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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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웅 영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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