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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Dec 19. 2022

특명! 탈출하고 멀어질 것!

기억 속 내 이야기




나를 끈적하게 물고 늘어지는 구질한 세계에서 건져준 것은 만화였다.  

만화책을 읽으면 그 순간은 현실 속 시끄러움을 잊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만화 그리는 데 빠졌다. 연습장에 스토리 만화를 통으로 그려 한 권의 책으로 만들면 친구들이 재밌다고 돌려가며 보았고 바닥에 그림 쪼가리가 떨어져 있으면 선생님이 당연히 네꺼지? 하고 건네주셨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화 동호회 활동을 시작하고 일상은 더 즐거워졌다. 만화를 그려 회지를 만들고 판매를 했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시내 카페에서 만나 그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종종 근처에 있던 '호산나' 음악감상실에 우르르 몰려가서 메탈리카, 본 조비, 일본 밴드 X-JAPAN 등 외국가수의 뮤직비디오와 음악을 들었다. 90년대 초 울산은 만화 불모지였는데 우리 동호회를 시작으로 만화 동호회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다른 동호회와 교류를 하고 부산, 대구 지역 만화연합 전시회도 다녔다. 이런 또래문화활동은 자칫 방황할 수 있는 사춘기 시기를 잘 지나가게 해 주었다. 내 생각과 에너지는 만화를 그리고 만들고 판매하는데 온통 모아졌다. 그 즐거움과 성취감이 공부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고 1부터 성적까지 좋아져 종종 장학금도 받으며 즐겁게 학교를 다녔다.


집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갈수록 집은 새엄마의 체취로 가득했다. 몇 번의 하소연을 했지만 바뀌는 게 없었다. 비록 자식이라도 부부관계는 끼어들어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나는 내 방이 절실했다. 방 두 칸 집에 오빠는 여전히 친구 한 명을 데려와 수시로 늦게까지 널브러져 잤다.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그림을 그리는 일까지 나만의 공간이 절실했지만 여전히 나는 아빠 옆에서 불편하게 자야 했다.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집을 보며 결국 나는 바꾸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대신에 얼른 어른이 되어서 독립할 결심을 했다.



내 인생을 위해 탈출하고 멀어질 것. 


행복해지려면 여기서 나가야 한다. 

언젠가부터 내 결정의 밑바닥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었다.

스무 살에 회사에 취직한 나는 스물한 살에 만화 동호회 동갑 친구와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독립을 했다. 보증금 60만 원에 월세 6만원인 다세대 방 한 칸이었지만 내가 애지중지 모은 만화책으로 벽면을 채우고 회사를 다녀와서 온전히 내 공간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자취를 할 때 주말은 집에 가기로  아빠와 약속을 했기에 토요일이 다가오면 한숨부터 나왔다. 집에 가는 게 곤욕이었다. 1박 2일 꾹 참고 월요일 출근하면서 집을 나서면 다시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며 자취를 하는 2년 동안 내 만화 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동호회 언니 둘이 만화를 그리러 서울로 상경했고 고등학교 때 잠시 만화 동호회 활동을 함께 했던 친구 한 명은 스무 살에 가장 먼저 만화를 그리겠다며 서울 상경을 했다가 덜컥 임신을 하고 만화 그리는 남편과 결혼을 했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니 친구는 출산을 하고 몸조리를 하러 울산 친정에 내려와 있었다.

친구는 남편이 화실을 차렸는데 화실 식구를 구한다며 만화 그릴 거면 본격적으로 서울로 올라오면 어떠냐고 했다. 






주말에 집에 가는 것도 싫어! 더 멀어지자!


회사 생활 3년,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사 생활을 잘하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돈을 조금 모을 정도만 할 생각이었기에 3년 만기로 부은 정기적금 천만 원을 타고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 그리고 서울행을 결정했다. 함께 살던 친구는 서울 친언니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나는 먼저 서울에 상경했다 잠시 내려와 있던 동호회 언니와 자취를 하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2년간 보금자리였던 자취방을 정리했다. 6개월은 꼼짝없이 집에 들어가야 했다. 자취하는 동안 집은 아빠가 아파트를 분양받아 이사를 했기에 다행히 집에 내 방이 있었다. 아파트로 이사를 갔으니 이제 집이 깨끗해지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 공간은 금세 예전처럼 더러워졌다. 

서울에 갈 때까지 조금만 참자. 금방 지나간다.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집을 구하러 서울에 다녀오고 3개월은 집 앞 아파트 상가에서 피아노를 배우며 상경 준비를 했다.  


멀고 먼 서울로 이삿날, 아빠는 간소한 내 짐을 이삿짐 트럭에 싣고 트럭 옆자리에 앉아 서울로 출발했다. 나는 룸메이트가 될 언니와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가 움직이면서 익숙한 울산 거리가 스쳐 지나갔다. 버스는 공업탑을 돌아 시외로 빠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서울로 향하고 있는데도 서울로 이사를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잘 지낼 수 있을까? 앞으로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버스가 달리는 동안 상념도 켜켜이 쌓였다.


아빠는 트럭 조수석에 장시간 불편하게 앉아 강북 우이동에 도착했다. 우리도 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타고 도착했다. 1층 주택이었는데 주인은 할아버지 내외였고 옆에 작은 방 두 칸이 우리가 살 집이었다. 아빠는 큰 가구 정리를 도와주고 자장면 한 그릇을 함께 시켜 먹고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 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바로 출발해도 울산에 도착하면 밤이 늦을 터였다.  '울산과 서울은 정말 멀지... 이제 진짜 아빠를 자주 못 보는구나' 내가 결정한 내 인생이었지만 아빠와 내가 사는 물리적 거리가 피부로 느껴져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물한 살에 일찍 결혼한 언니가 서운했던 아빠는 막내인 나는 늦게 결혼하고 아빠 옆에 오래 있을 거라 믿었다고 했다. 얼마 전 제주도에 아빠를 초대해 함께 여행을 했다. 저녁에 술자리를 하다 25년 전 서울 상경했던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빠가 나를 서울 자취방에 데려다주고 고속버스를 타고 오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그날의 아빠가 새록새록 떠올라 마음이 시큰해졌다. 

자식을 위해 꿋꿋이 살고 자식을 위해 재혼을 선택했지만 성인이 된 자식들이 금방 결혼을 하거나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니 얼마나 헛헛하셨을까.


난 자리는 표가 나는 법이라고 빈 내 방을 보며 아빠는 수시로 내 생각을 하고 보고 싶어 하셨겠지만 나는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점점 울산도, 아빠를 생각하는 시간도 뜸해져 갔다. 

서울에 온 뒤로 몸이 고생일 때는 있었지만 거리가 멀어지고 직접 보지 않으니 마음은 참으로 평안했다.  아빠를 자주 못 보는 대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바꿀 수 없는 것은 멀어지고 외면하려 했다. 


지혜롭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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